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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한국이 올림픽을 또 한다고?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IOC는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로 서울을 확정지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인한 전 국토의 황폐화로 그 아무도 한국에 희망을 갖지 않았지만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줬습니다. 올림픽 개최는 더 이상 대한민국이 세계의 변방이 아닌 저력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1981년 서울 올림픽 개최 확정으로 북한은 남한과의 체제 선전에 불리함을 느끼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축제인 세계청년학생축전(이하 평양축전)을 1989년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추진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cafe.naver.com/kjij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3771&       

 

 

 세계청년학생축전(世界靑年學生祝典,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은 주로 진보성향 및 좌익계열의 청년과 학생들이 참가하는 축전이다. 

 

 194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1차 세계청년회의(World Youth Conference)에서 세계민주청년연맹이 결성되었고, 1946년 제1차 이사회에서 국제적인 청년축전의 개최를 결정하였다. 1947년 7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국제학생연맹 (IUS)와 함께 제1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였다. 1957년 소련에서 개최되었던 제6차 모스크바축전은 축전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인 34,000명의 인원이 참가해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이러한 대회를 국가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공산권 국가들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공산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대회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59년 제7차 축전까지 격년제로 거행되다가, 그 후 4년마다 개최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1989년의 평양축전은 가장 많은 나라가 참가하여 성대하게 치러졌으나, 그 이후로 냉전 구도의 해체와 공산권의 몰락으로 대회 참가 인원과 참가국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2001년 알제리 알제에서 개최된 제15차 축전은 대회 규모가 위축되었다. 가장 최근에 거행된 축전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개최된 제17차 축전이었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  

 

평양축전 당시 거리 모습과 경기장 모습 

 

 

      

 

 서울올림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외교적으로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를 방해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북한은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친북 국가들에 대해 로비를 벌였습니다. 우선 방문 대상국으로 아프리카의 잠비아, 짐바브웨, 마다가스카르, 세이셜, 탄자니아, 우간다, 모잠비크 등이 뽑혔고 그 다음으로 선정된 나라는 올림픽 참여 여부를 고민하고 있었던 소련, 불가리아 등이 였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은 북한에게 좋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첫 방문 국가인 탄자니아는 1960년대 이후 사회주의 국가여서 친북한 국가였지만 80년대 자본주의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서울 올림픽 보이콧 제안에 거부를 하였습니다. 생각보다 자신들의 우방이라고 느꼈던 국가들의 서울 올림픽 참가에 놀란 북한은 어떻게든 올림픽 참가 방해하기 위해 내정이 불안한 마다가스카르에 식량 1만t과, 시멘트 2만t을 지원 협약을 하여 서울 올림픽 참가를 방해하였습니다.   

 사회주의권 국가들도 민주화와 자유주의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북한이 공작을 보낸 국가 중에 마다가스카르와 셰이셀을 제외한 나라들은 서울 올림픽 참가를 이야기 하였고 결국 북한의 방해공작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보이콧을 보인 국가는 마다가스카르, 셰이셜, 쿠바, 알바니아이며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캄보디아는 자국 내정 불안으로 참가 불가) 결국 12년 만에 동서양 진영의 국가들이 참가하여 그 당시 역대 최다 국가인 160개국이 서울 올림픽이 참가하였습니다.   

 

 서울의 하계올림픽 개최에 자극 받은 북한은 평양축전에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이에 177개 국가, 22,000명이 참가하여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22,000명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서 북한이 체제 선전에서 결코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였습니다.    

 내부적으로 북한은 평양축전를 위해 대규모 경기장, 공연장, 호텔 등을 건설하였는데 대표적인 건물은 릉라도 5월1일 경기장, 평양국제영화회관, 동평양대극장, 평양교예극장, 양각도 축구경기장, 류경호텔, 평양국제통신센터, 만경대 소년학생궁전 등이였습니다. 북한은 평양축전을 위한 건물 건립에 45억달러를 사용하였습니다.      

 

미주 지역과 캐나다 지역을 포함, 항공권은 본인 부담, 북한측에서는 숙식과 다른 편의제공 조건으로 재미교포들 중 특별 선발하여 총 26명을 초청했다. … 북한이 도와주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짜로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 행사 기간에 대동강에는 꽃배 유람선을 띄워 선내에서 어린 학생의 춤과 노래를 보면서 함께 어우러져 즐길 수 있게 했다. 

아 평양아…, 김찬구 저, 2005        

 

또한 외국인에 대한 축제 초청과 참가인원의 수송을 위해 벤츠 1,000여대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들의 체류비용에 15억 달러를 사용하여 평양축전에 사용된 총 비용은 60억 달러정도였습니다.   

 

 북한은 평양축전을 위해 북한은 '200일 전투'를 실시했습니다. 북한의 성장과정을 보면 북한에서는 단기간에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전투'라는 이름 아래 주민들을 동원하였습니다. 단기간에 최대한의 능력을 보여주고 몇 년간 침체기를 갖는 비정상적인 군중동원은 북한이 자주 사용하는 군중동원 방법입니다.

 결국 200일 전투 이후 주민들은 생산성 감소를 보였고, 결국 90년대 이후 최악의 경제상황 등장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무리한 평양축전의 결과 경제난의 심화와 서구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충격을 받아 내부의 동요가 심각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로써 90년대 북한이탈주민 대량 발생과 체제폐쇄를 더욱 가속 시켰습니다.     

 

 서울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 평양에서는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한 광복거리, 체육촌 등 건설사업이 한창이었다. 당시 북한 주민들도 국가차원에서 평양축전을 준비하느라 상당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서울에 갔던 외국사람들이 평양에 와서 '야, 이거 평양이 서울만 못하구나' 이렇게 말할까봐 국가에서 총력을 기울인다"는 말이 흔하게 나돌았다.  도시 주민들은 서울올림픽과 관련 "남조선이 올림픽을 하는 정도면 많이 발전했다는 것인데 듣기와 다르게 경제적인 배경이 든든한가 보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일부 간부들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는 수준이면 경제가 많이 발전했다는 증거"라면서 "신문에 나오는 남조선 사람들의 옷 차림만 봐도 경제가 발전한 것이 눈에 띈다"면서 동경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정말인가?  남조선이 또 올림픽을 하나?", 뉴데일리, 온라인, 2011.7.7 中    


 서울 올림픽이 폐막 되고 동구권의 헝가리와 폴란드는 자신보다 열악했던 대한민국의 발전 된 모습을 보고 공식 외교 관계를 갖는 등 우리나라의 북방정책과 맞물려 공산권 국가들이 대한민국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동구권에 우리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줬습니다. 평창 올림픽 개최로 더 한 단계 발전된 대한민국을 보여줘 우리가 한반도의 통일에 더 자유민주주의가 더 세계보편적인 가치인 것을 확인시켜주고 우리민족의 정통성을 보여줘 할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아 평양아…, 김찬구, 비봉출판사, 2005

평양 25시, 고영환, 고려원, 1992

"정말인가? 남조선이 또 올림픽을 하나?", 뉴데일리, 온라인, 2011.7.7

위키백과 - 제24회 하계 올림픽 & 제13회 세계학생청년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