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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심화조 사건'은 무엇일까요?

심화조 사건

 


 안녕하세요. 9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황주룡입니다. 오늘은 심화조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심화조 사건을 다루기에 앞서, '심화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겠죠? ‘심화조라는 명칭은 주민등록 요해를 심화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각각 세 개의 경력카드가 있고 이 카드를 이용해 평생 주민들을 감시하고 구속합니다. 하나는 인사사업을 위한 당위원회 보관용 간부문건으로 불리는 주민등록 요해 문건, 또 하나는 국가보위부에서 그 사람의 정치적 동향이며 발언까지 일일이 기록한 사상검토 차원의 주민등록 요해 문건, 나머지는 사회안전성에서 사돈의 12촌까지 기록한 족보집 같은 주민등록 요해 문건입니다. 서관히 간첩사건 이후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에 공화국 최고의 특권을 주었고, 각 도··군에 조직을 결성하게 됩니다. 평양 각 구역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수십명의 고급인력이 배치된 심화조를 총지휘하기 위해 사회안전성에 심화조 총지휘본부가 설치되었고 책임자는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대장, 지휘부 참모장은 사회안전성 참모장 황진택 상장이 임명되었습니다. 심화조의 총인원은 8000명 이었고 1997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 심화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25,000여명에 달했습니다.


 사건 전개 과정


(1) 일대사상전쟁

 경제난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노동자들의 농성투쟁과 같은 거대 반란이 속출하자 김정일은 위·아래를 모두 장악하기 위해 일대사상전쟁을 개시하게 됩니다. ‘국부(國父)가 없는 틈을 노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들이 침략전쟁의 기회를 노린다며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는 한편, ‘혁명의 수뇌부를 암살하려고 테러분자까지 침투시킨다는 내용으로 강연회를 비롯한 대대적인 정치공세를 나섬으로서 온 나라 주민에게 혁명적 경각성과 함께 강력한 조직적 통제를 강요하게 됩니다.


1997년 평양에서 간첩 혐의로 공개 처형된

중앙당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 


(2) 서관히 간첩사건

 서관히는 김일성 밑에서 당 중앙위 농업담당비서로 일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는 비료 30t을 친인척들에게 장사목적으로 빼돌렸다는 혐의로 사회안전성 산하 보통강구역 안전부에 수감돼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일을 대신해 극심한 식량난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장성택이 간부들의 뒷조사를 하던 중 서관히의 비료유출 자료를 손에 넣었고 이것을 빌미로 그가 수감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김정일은 미국 간첩으로 포섭되었다는 혐의를 추가시켜 서관히를 인민재판장에 세우도록 했습니다. 이후,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에 심화조라는 것을 만들고 당··내각 안의 고위직 김일성 측근 인물들을 사정없이 제거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안전성은 그전까지만 해도 사법권을 거의 갖고 있지 못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장성택의 영향력 아래 최고의 권위기관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장성택

(3) 용성간첩사건

 ‘용성간첩사건은 서관히 사건의 제2막에 해당합니다. 6·25전쟁 당시 남조선 특수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최고사령부 타격대가 평양 용성에 침투했다는 그곳 주민의 옛이야기를 토대로 지역 주민들의 경력을 요해하였습니다. 그 결과, 경력을 기만한 흔적과 이상이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었고 그 사람들은 그때 침투해서 아직까지 잠복해 있는 간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당간부들도 대거 속해있었습니다. 간부들 중에서 간첩혐의로 잡힌 대표적 인물들은 중앙당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 그리고 평안남도 당책임비서 서윤석이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장성택과 채문덕에 의해 개인적인 사유로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6·25전쟁 시기에 활동했던 도당 책임비서들과 인민위원장들은 거의 전부 수감되었고 박사, 교수, 노동자, 농민 등 직종에 상관없이 6·25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의심이 가는 이들은 심화조에 불려가야 했고, 평소 심화조 성원들과 앙숙이었던 사람들 또한 대부분 고문으로 살해되거나 간첩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게다가 북한의 악법인 정치범 3대 멸족으로 인해 그들의 고통과 억울함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4) 공동협의회 구성

 심화조의 권력횡포가 도를 넘게 되자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공동협의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이들은 전국의 심화조 예심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였고 그 내용은 사회안전성의 비인간적인 고문·학대와 과장된 사업실태, 그리고 권력남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으로 인한 민심변화와 그 부정적 현상들을 골자로 하는 정세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를 녹음테이프와 함께 김정일에게 제출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김정일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게 됩니다.


김정일

(5) 사건 이후 김정일의 행보

 김정일은 민심을 달래고 격앙된 정국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사회안전성의 불법행위를 조사하도록 당중앙에 검열과를 조직하게 되었고 심화조 해산 및 지휘성원들을 모두 체포하는 등 심화조에 대한 소탕작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중앙당 조직부 사회안전성 담당책임지도원 리철, 사회안전성 주민등록국 국장, 용성구역 안전부 수사과장 네 사람에게 장성택의 책임까지 떠넘겨 총살시키게 됩니다. 사회안전성 참모장 황진택과 각 도시군안전부장과 정치부장 등 전국의 안전원 6000여명에게는 중형이 내려지게 됩니다. 김정일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사회안전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그 명칭을 사회안전성에서 인민보안성으로 바꿨습니다. 또한,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는 심화조 피해자들을 석방시키게 됩니다. 본의 아니게 가족해체를 당해 재산과 집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임시로 집단거처를 마련해주고 쌀과 기름을 공급해주는 특혜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심화조 사건을 보면 김정일이 어떻게 1인지배체제를 확립해 왔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심화조 사건을 주도했던 장성택은 결국 13년 말에 처형이라는 방식으로 숙청됩니다. 장성택은 자신의 주도 하에 숙청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북한의 3대 세습체제로 인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피를 흘린 듯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