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9기 노도희 기자입니다. 어느덧 10월 다 끝나가면서 이제는 가을도 가고, 겨울이 오는 것 같습니다. 날이 전체적으로 많이 쌀쌀해지면서 추위가 조금씩 다가오는 것이 실감이 드네요! 아무쪼록 날이 추워지는 만큼 감기와 건강에도 더 유념하셔서 몸이 아픈 일이 없으셨으면 합니다!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북한군 서울'
오늘은 북한군, 즉 조선인민군 창군의 핵심적인 부대 역할을 했었던 '조선의용군'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으로 조선의용군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여러분들이 많이 알고 있으시다시피, 6.25전쟁 초기에 우리 국군은 북한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속수무책으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이는 북한군이 우리보다 더 많은 탱크와 화포, 항공기 등과 무기와 탄약 등을 소련으로부터 지원받고, 더 철저히 계획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우리 국군이 전쟁 초기에 크게 밀렸다고 볼 수 있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인 '전쟁, 전투 경험'이 북한군에게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군은 6.25전쟁 전에 다른 국가와 전쟁을 벌인 것도 아니고 어떻게 국군보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력으로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6.25전쟁 직전에 조선의용군이 조선인민군에 합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의용군'. 부대의 이름을 보면 느낌이 오다시피, 조선의용군은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 탄생된 '항일무장단체'입니다. 조선의용군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면, 사실 그들의 출발은 '조선의용대'에서 출발합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국의 한커우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입니다. 김원봉이라는 사람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몇 주전에 개봉한 '밀정'에 나오는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입니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창설하여 일본 요인들을 암살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개별적인 암살로는 독립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중국 관내(대륙)으로 들어와 집단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노력의 결실로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즉 조선의용군 활동 기록',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조선의용군'
조선의용대는 당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서 대항하던 중국 국민당의 당수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창설하게 되었는데요, 주요 활동은 중국 국민당 군대를 지원하여 첩보활동, 포로 심문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사실상 직접 전투는 거의 참가하지 않고 후방에서만 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활동방향에 대해서 조선의용대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신악, 윤세주, 박효삼 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따로 편성하여 화북지역으로 북상하여 일본에 대해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는 크게 '조선의용대 본대'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조선의용대 본대는 1941년에 '중국 국민당'의 임시 본거지였던 충칭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산하의 '한국광복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지역으로 북상하여 일본군을 대적하여 후좌장전투(1941.12.12), 싱타이전투(1941.12.26), 편성전투(1942.5.28)을 치루면서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계속해 나갑니다. 하지만 조선의용대 본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 뒤, 본대가 없어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그들 스스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게 됩니다.
'조선의용군 단체사진',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조선의용군'
이후 조선의용군은 공산주의자 '김두봉'을 지도자로 세우고, 그를 당수로 하여 '조선독립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조선의용군'을 그 조직의 산하로 만듭니다. 조선의용군은 조선의용대와 다르게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조선인 항일무장단체였는데요,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본거지를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옌안'으로 이동하게 되고 그곳에서 항일무장운동을 지속하게 됩니다.
비록 '조선의용대 본대'는 '중국 국민당(장제스)'이 지원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중국 공산당(마오쩌둥)'이 관리하는 구조속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여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하게 되었지만, 당시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선생의 노력에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합작 항일무장투쟁을 서로 검토해보기도 할 정도로 항일에 있어서의 서로의 의지는 일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을 한 뒤에는 서로의 입장이 달라졌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후, 조선에는 광복이 찾아왔고, 중국에는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전쟁은 바로 2차 국공내전이었습니다. 국공내전이라는 것은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의 내전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본이 패망한 당시에,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던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은 바로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지원과 관리를 받던 조선의용군은 바로 조선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력 하나, 하나라도 아까웠고, 특히 항일무장투쟁을 거치면서 많은 전투경험으로 무장된 조선인 베테랑 부대를 그대로 조선으로 돌려보내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용군의 행동 결정권을 쥐고 있던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용군에게 만주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조선의용군 대열',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조선의용군'
당시 만주는 일본의 만주군이 주둔하던 곳이었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난 뒤 중국 공산당이 먼저 세력을 넓히냐, 중국 국민당이 먼저 세력을 넓히냐가 매우 중요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만주로 보내 중국 공산당이 만주에 세력을 선점확장할 수 있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결국 조선의용군은 항일투쟁을 위해 창설된 부대였지만, 중국 공산당의 지휘아래 중국 국민당과 전쟁을 치뤄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1949년, 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을 중국 대륙으로부터 몰아내 타이완을 쫓아내 중국 공산화를 이루어내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싸우던 조선의용군 역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간 곳은 분단되어 버린 한반도였고, 조선의용군의 입국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중국 모택동을 방문한 김일성과의 협조아래 북한으로 밀입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1938년부터 1949년까지 10여년을 일본과 중국 국민당과 전쟁하면서 수 많은 전투로 단련된, 산전수전의 역전용사 조선의용군의 베테랑 군인들은 자연스럽게 북한군의 전력으로 흘러들어갔고, 그들은 북한군의 여러 사단의 핵심 전력과 핵심 간부들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실전 경험, 전투 경험 등에 있어서 그 어떤 부대보다도 우월했던 조선의용군이 북한군으로 흡수되어 그들의 핵심 전력이 되었고, 거기다가 소련이 지원해주는 탱크와 대포, 항공기 그리고 여러 군수물자로 완벽히 준비가 되어있던 북한군에게 6.25전쟁 초기에 국군이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의용군의 한 군인',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조선의용군'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하고, 안타까운 점은 바로 어느 독립군 부대에 속했든, 한 마음 한 뜻, 그리고 태극기 아래에서 일본 제국군에 대항해 나라를 되찾고자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쳤던 조선인 독립군 용사들이 역설적이게도 나라를 되찾고나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사이가 되어 싸운 역사입니다. 조선의용군에 속하여 일본군과 싸웠던 용사들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는 현재 국내에서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한국광복군은 한 번쯤은 들어보았어도 조선의용군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그 현실을 직접 실감할 수 있습니다. 왜 연구나 조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냐면, 바로 조선의용군 그들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위하여 싸운 '공산군'이라는 평가를 내리기 때문입니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그들 역시 한민족의 평화와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용사라는 것을 우리 한민족이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지금까지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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