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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평화의 섬 연평도 탐방! 제1연평해전 전공비를 둘러보며,

안녕하십니까. 통일부 기자단 9기 기자 김규진이라고 합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연평도 안보 교육장에 이어 제1 연평해전비에 관해 다루려고 합니다.

제1 연평해전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왜? 제1 연평해전일까? 하고 궁금해 하실겁니다.

사실, 연평해전은 총 두번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제2 연평해전과 같은 경우 영화로 제작되어 600만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흥행해

 많은 분들에게 이름을 알렸지만 영화의 흥행에 가려져

 제1 연평해전은 많이 묻혀버렸습니다.


(제 2연평해전 포스터)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온 대한민국이 붉게 물들고, 하나가 되었던 그때, 

대한민국을 지키다 순국했던 용사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 그것보다 더 옛날, 또 다른 용사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평도 배 선착장에 도착해 마을로 가는 길목을 굳게 지키고 있는 제1 연평해전 전승비 입니다.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제 1 연평해전 전승비는 올곧은 우리 해군의 모습을 형상화 시킨듯 합니다.

"이 전승비는 1999년 6월 15일 연평근해 북방한계선(NLL)을 불법 침범한 북괴 해군과 이를 저지, 응징하려던 우리 해군과의 해전에서 이룩한 우리 해군의 승전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 국민에게 군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고 대북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안내문에서도 나라와 영해를 지키기 위했던 해군들의 애국정신이 드러납니다.

제1 연평해전은 1999년 6월 15일에 북방한계선 NLL을 넘어 한국 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한국 해군의 고속정이 선체를 충돌하는 방법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입니다.

당시 북한의 경비정은 1999년 6월 6일부터매일 북방한계선을 넘어 내려와 몇 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며

 우리 해군의 반응을 살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9일째가 되던 날, 6월 15일에 북한 경비정 2척과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 20척 등이 NLL을 넘어 우리 해역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에 우리 해군이 선체를 충돌하여 북한의 경비정을 밀어내었습니다.

 그러자 북한의 경비정이 소총과 25mm 기관포를 발사하며

 제1 연평해전으로 이어지게되었습니다.


(북한의 경비정(왼쪽)을 선체 충돌로 밀어내는 우리 해군의 참수리 325호)

(교전을 벌이는 우리 해군(왼쪽)과 북한의 680 경비정 =출처 동아일보)

이후 제1 연평해전은 14분 가량 진행되었고, 당시 참수리 325호에 타고있던 안지영 대위를 비롯하여 

국군 장병 7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우리군의 희생자는 없었지만,

 그에 반해 북한군은 어뢰정 1척 침몰, 경비정 1척 반파, 3척이 파손되고 1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1 연평해전이 있던 1999년 11월 11일에 세워진 것이 바로 지금의 제1 연평해전승비 입니다.

제1 연평해전 이후 안지영 대위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상하였으며,

 해군 유공장병 7명은 1계급씩 특진을 하였습니다. 

이는 6.25 전쟁과 월남전 이후 처음있었던 교전이후 특진이라고합니다.

(현재 소령으로 윤영하함의 함장을 맡게 된 연평해전의 영웅 안지영 소령=출처 부산일보)

우리나라와 영해를 지키겠다는 우리 해군의 굳건한 의지와 애국정신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승리였을 것입니다.

1999년 11월 11일 전승비를 건립하면서 해군참모총장은 북방한계선을 확고히 수호한다는 강한 안보의지를 나타내었습니다.

지금도 바다를 지키고 서있는 제1 연평해전전승비는 여전히 굳건하기만 합니다.

 비록 두 차례의 걸친 연평해전으로 서해 바다는 아픔을 품었지만 앞으로는 남북이 하나되어

 서해가 너와 나의 바다가 아니라 우리의 바다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다시는 이러한 교전으로 생명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 되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