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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KBS스페셜 '어느 인민군 병사의 수첩'

 

 

 

   KBS 스페셜 '어느 인민군 병사의 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던 병사 최석도(92) 노인의 수첩에서 발견된 ‘병덕’의 글을 바탕으로 국군포로의 삶을 추적합니다. 

 

 

  KBS스페셜 어느 인민군 병사의 수첩

 ■방송일시: 2011. 7. 3 (일)밤8시(60분) KBS 1TV

 ■연출:유희원 프로듀서/글·구성:정윤미 작가

 

 

  최석도 노인의 수첩은 '비망록'이라는 이름으로 전쟁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비망록 (1955년)은 6·25전쟁 시기에 북한군으로 복무한 최석도가 전쟁이 끝난 1955년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수첩. 수첩에는 소대근무자 회의내용, 가족에 대한 단상, 동료•선후배들과의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수첩은 '병덕'이라는 이름의 국군포로가 적대관계라고 할 수 있는 인민군의 수첩에 글을 남긴 것입니다. 과연 이 수첩 속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존경하는 벗,석도동지에게

 

春風秋雨(춘풍추우)二年(2년)이란歲月(세월)을

서로喜怒哀樂(희노애락)을

같이 나누며 의좋은親兄弟(친형제)의 같이 지나던 우리의 사이는

오늘의 이별로 갈리게 되었소

이 땅이 그리 각막하지 않거니

오늘 비록離別(이별)의 쓴握手(악수)로 헤어지지만

기어코 기약 없는 그 어느 날 그 어느 곳에서

歡喜(환희)의相逢(상봉)이 뒤 따를 것이요.

부디 편지가 갈 수 있는 그날 편지나 얹어주오

 

-병덕의 편지中

 

 

 

 

 

   제작진은 중국의 한 조선족 마을에서 수첩의 주인인 인민군 출신 최석도(92)노인을 만났습니다. 정전 무렵 두 사람은 청진 근교의 철도경비대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합니다. 둘은 인민군과 국군포로로 만난 사이였지만 허물없는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최석도 할아버지는 명덕이 서울 말씨를 쓰고 매우 똑똑했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군포로였던 병덕은 어떻게 인민군이 되어 최 노인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그 시기에 북한군은 미군의 공습이후 병력손실이 상당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의용군을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국군포로를 인민군에 강제 편입시킨 것입니다. 북한에 포로로 잡힌 병덕도 인민군에 강제 편입되었던 것이지요.

 

 

 

 

 

   정전 후 자유송환원칙에 따라 포로송환이 이루어졌지만 병덕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병덕을 추적하며 만난 국군포로들은 당시 많은 국군포로들이 송환되지 못한 채 북에 남겨졌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들은 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까요?

 

 

  한국 전쟁이 끝나고 송환된 포로들이 반드시 지나야 했던, 임진강 다리. 적게는 4만 명, 많게는 7만 명에 해당하는 사람이 북한의 포로로 잡혔지만 이 다리를 통해 남한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7천여 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전 협정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거냐 그런 심사가 있어요.

아주 공포분위기에요. 의심스러워서 안 가겠다고 한 사람들 무지하게 많다 이거야”

-유창상/귀환 국군포로

 

 

<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돌아왔다고 해서 명명된 임진강 ‘자유의 다리’>

 

<북한 기록에 따르면 전쟁 1년 동안에만 그들이 잡은 포로의 수는 8만 5천여 명에 달한다.>

 

   그렇다면 북에 남겨진 국군 포로는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전쟁 후 북한은 폐허나 다름없는 북한 전역을 재건하기 위해 김일성의 주장에 따라 경제 중공업 위주의 경제복구 계획을 세웠습니다. 중공업 건설을 위해 석탄 채굴 산업 등이 시작되었고 북한은 그 인력의 상당수를 국군 포로로 충당하였다고 합니다. 국군 포로의 상당수는 온성 탄광으로 보내졌는데요. 그들은 영하 30도로 떨어질 만큼 혹독한 추위가 있는 온성 탄광에서 몸이 다 망가질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철도 경비대에서 근무했던 최석도 노인이 병덕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합니다. 둘은 1955년까지 같은 부대에서 일했고, 그 후 최석도 노인은 평양으로, 병덕은 함경북도 온성으로 보내졌습니다. 최석도 노인이 기억하는 병덕의 모습은 여기까지이고 병덕은 꼭 다시 만나자는 글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지요. 온성으로 간 병덕의 삶이 궁금해졌습니다. 그의 삶을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02년 탈북한 윤정호 할아버지. 국군포로였던 그도 온성탄광에서 일을 하였는데요. 국군포로들은 위험한 탄광에서조차 차별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차별은 자식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국군포로 아버지를 뒀다는 이유로 결혼조차 하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결국, 북한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아들의 권유로 탈북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7년 전 아버지의 유골 안고 탈북 했던 배영숙씨. 국군포로였던 그의 아버지는 북한이 1997년 식량위기로 배급 중단 하자결국 굶주림으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합니다. 그의 소원은 죽어서라도 이 땅에 묻히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북한에 남겨진 국군 포로의 삶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힘든 노동을 하고, 게다가 북한 사회의 차별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제작진은 병덕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최석도 노인에게서 받은 단서는 그가 인민군으로 입대했다는 것, 온성의 탄광으로 보내졌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병덕’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온성 출신 국군포로와 탈북자를 중심으로 수소문하던 중 ‘이병덕’을 보았다는 탈북자의 제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병덕'이 똑똑하며, 인민군에 갔다 왔다고 증언했습니다.

 

 

<전사자 명단에 등록된 이병덕은 모두 15명>

 

그리고 추적 끝에 남한 측 ‘이병덕’의 유족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병덕’의 아들 이명희 씨를 통해 전쟁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족의 삶을 알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아버지의 전사 소식에 어머니마저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고,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남매는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고 합니다. 

 

 

 

 

 

 

   과연 ‘이병덕’은 수첩 속의 ‘병덕’이 맞을까요? ‘이병덕’이 유품으로 남긴 책과 ‘병덕’이 남긴 수첩의 글씨를 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긴 결과 동일한 한자와 한글을 비교했을 때 획을 긋는 순서와 형태 등이 달라 서로 다른 필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글씨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펜, 하나는 붓글씨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동일성을 판단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죠.

 

 

오늘, 한 권의 빛바랜 수첩을 통해서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첩 속의 '병덕'을 찾지 못했지만 그를 찾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병덕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생사가 확인 되지 못한 채 전사자로 남겨진 국군포로들을 말이죠.

 

북한에서의 국군포로로서의 고된 삶, 그리고 남한에 남겨진 유족들의 아픔.  

전쟁이란 비극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아마 '통일' 밖에는 없지 않을까요?

남한과 북한이 다시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상생기자단 4기의 이예원 기자였습니다. 

 

 

KBS스페셜 http://www.kbs.co.kr/1tv/sisa/kbsspecial/index.html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