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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의 시장화, 어떻게 볼 것인가?


90년대 중반 이후 북한과 관련하여 최대의 이슈로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의 시장입니다. 북한 시장과 관련하여 암시장, 장마당, 시장경제 등 여러 시간적, 공간적 배경들을 대상으로, 북한 시장이 북한이라는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지금까지도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북한 시장과 관련한 경제학적 분석에 따르면, 북한 시장은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북한 정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반면 정치학적 분석에 따르면, 북한 시장은 사회를 변화시킬 만큼 공고하지 못하며, 북한 당국이 시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주장에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그럼 북한의 시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시장(市場). 명사.

1. 여러 가지 상품을 사고파는 일정한 장소. [비슷한 말] 시상(市上). (場).

   (예문) 손님 부르는 소리, 값 흥정하는 소리 등으로 시장 전체가 소리로 가득 차 있었으나... (출처: 윤후명, 별보다 멀리)

2 . <경제>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영역. 

   (예문) 미국은…영토에 대한 야심은 없을지 몰라도 시장을 지배하려는 경제적 야심은 대단한 나라거든. (출처: 이병주, 지리산)


먼저 시장이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시장이라고 하면 슈퍼마켓, 마트, 재래시장 같은 장소 혹은 공간으로서의 시장이 연상됩니다. 그러나 이는 '시장'이라는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부분의 일부일 뿐입니다. 시장, 특히 북한의 시장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 범위가 훨씬 포괄적입니다. 국립국어원이 정의한 시장의 두 번째 개념은,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영역"입니다. 즉 인적, 물적, 공간적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합쳐져 교환의 기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제도, 혹은 시스템인 것입니다.



1990년대 이후 북한에서 시장이 확산되면서 북한의 시장화를 분석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석 및 연구는 주로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시장이 기본적으로 경제현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들은 북한의 시장을 이중적으로 파악했습니다. 북한의 경제를 '계획경제/시장경제', 혹은 '공식경제/비공식경제'로 구분하고, 이 중 시장경제 혹은 비공식경제를 시장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이를 이중경제론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 계획경제는 공식경제, 시장경제는 비공식경제입니다. 


경제학적 분석에 따르면 국가경제의 붕괴에 따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상거래와 개인생산을 확대하면서 시장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아래로부터의 시장화론' 또는 '자생적 시장화론'이라고 하는데, 가계와 같은 경제주체들이 자력갱생 차원에서 벌인 비계획적 활동에 의해 시장화가 추진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의 시장은 경제난의 조짐이 보였던 1990년대 초반에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시장은 국가의 통제와 관리를 받는 공식경제 혹은 계획경제와 상대적으로 분리된 영역이며, 사회적·정치적 권력 관계와 분리되어 발생하고 전개되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시장이란 국가의 통제와 관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영역으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같은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영역으로 여겨집니다. 즉 북한의 시장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의 시장과 유사한 것으로서, 정치제도의 차이에 관계없이 어디에서나 동일한 내용과 법칙으로 작동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결국 경제학적 견지로는 시장의 확대나 비공식경제의 확대는 정권에 위협을 가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경제의 영역 또한 확장되며, 이로 인해 시장에 대한 정권의 통제능력이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장의 확대가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심화시키고, 각종 부정부패 및 범죄를 만연하게 하여, 사회적인 불안을 증대시키고 국가적 기능을 저하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경제난 이후 북한 내 시장이 확산되자, 북한 지도부는 2002년 획기적인 경제조치를 취합니다. 이것이 7.1경제관리개선조치로서, 시장경제 및 비공식경제를 국가의 공식 계획의 일부로 포함시킨 것입니다. (관련기사: "북한의 경제개혁 -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로써 북한 시장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사라지고, 삼중, 사중으로 다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대두되었습니다. 또한 북한 시장화에 대한 북한 정권의 대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북한 시장에 대해 더 사회적이고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MIT 경제학과 교수인 D.애쓰모글루와 하버드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J.로빈슨 교수는 공동저작인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에서,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어떤 나라는 번영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제도이지만, 정치와 정치 제도가 어떤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결정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서의 시장은 당-국가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에서의 시장(경제)는 당-국가(관료제)에 의해 조정됩니다. 정치학적 분석은 경제학적 분석이 이 부분을 놓쳤으며,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정부의 역할을 자본주의에서는 개입자 내지는 조정자, 사회주의에서는 조직자 혹은 기획자로 설정합니다. 그런데 북한 시장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경제학적 분석이 주를 이루었으며,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북한 시장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할 때는 북한 당국을 기획자보다 개입자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그 결과 북한에서 당국의 영향력이 실제보다 과소평가되었으며,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정치학적 분석입니다.


정치학적 분석은 ‘권력과 권력관계가 현실시장의 구조와 작동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정치학적 분석에 따르면, 정치제도에 따라서 경제제도와 시장의 성격이 결정됩니다. 또한 시장에 대한 동일한 제도도 나라마다 작동 방식이 상이하며, 시장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단위입니다.


권력이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되어 있는 경우, 경제제도는 경제적 이득이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진 집단에게 배분되도록 작동합니다(이를 추출적 정치제도라고 합니다). 경제적 이득구조가 정치적 권력구조에 조응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 권력이 강력한 그룹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경제제도를 지속적으로 바꾸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영향력을 균형있게 도구로써 사용하여 이기적 목적을 추구합니다. 


정치학적 분석은 정치 중심적인 북한 시장에서 시장화의 추동력은 정치권력에게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시장세력론' 혹은 '시장의 위계적 구조론'이라고 합니다. 경제학적 분석에서는 시장화의 추동력이 주민들에게 나온다는 아래로부터의 시장화론, 혹은 자생적 시장화론을 주장한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정치학적 분석은 북한 시장화에서 주민들의 능력과 역할마저도 정치제도 혹은 당국의 계획과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북한의 이러한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북한의 무역회사입니다. 북한에서 대외무역을 담당하는 것은 상당수가 돈주[錢主]라고 불리는 신흥부유층입니다. 이들은 북한 공식기구가 가지고 있는 무역권한권(와크)을 빌려 사업을 하며, 외화를 벌어들입니다. 또한 북한 공식기구는 돈주들에게 무역권한권 뿐만 아니라 각종 설비, 원자재, 전력 등도 제공합니다. 신흥부유층은 이를 바탕으로 시장경제적 시스템에 따라 돈을 벌고, 벌어들인 돈의 일부는 회사 운영자금 등으로 이용되며, 나머지는 중앙 상급기관에 납부됩니다.


북한의 경제는 정권이 시장을 계획에 포섭시켜버린, 공식기구와 비공식기구가 적절히 상호작용하는 혼합경제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획경제에 시장적 상업활동이 침투해있고, 시장경제에 국가의 중앙기구가 얽혀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북한 당국이 시장화에 대해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시장을 활용하지 않으면 경제가 끊임없이 축소되고 악화되지만, 시장을 활용할수록 시장이 통제범위에서 이탈하여 체제불안요인이 증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학적 분석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시장화를 추동한다고 해서 정권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시장화를 정권안보에 복무토록 합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앞서 살펴본 무역회사를 통한 시장 통제입니다. 공식기구의 경제적 권력은 정치적 보호에 힘입은 비공식기구를 통해 구축되고 공고화됩니다. 


한편 이는 정경유착형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심화시킵니다. 무역권한권은 정치적 기준에 따라 배정되며, 이는 사실상 무역독점권을 받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무역권한권을 배분받은 기구는 독점적 구매·판매로 이윤을 남기고, 이는 중앙기구에게 납부됩니다. 무역권한권을 매개로 정권과 돈주는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북한 정권은 시장에 대해 주기적으로 억제정책을 펴는데, 이는 정권이 시장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간섭해 시장을 정권이 의도하는 대로 조작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이 시장화를 허용하는 이유는 앞서 살펴봤듯 민간의 돈주를 통해 돈을 벌어들이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이용하여 비공식기구를 통제하는 순환적 통제 구조를 확립하기 위함입니다. 간헐적으로 억제정책을 펴면 돈주들이 정권에게 복무하는 것이 중요해짐으로써 정권의 권력이 강고해지고, 또 한편으로 신흥부유층의 경제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경유착을 강화하는 악영향을 낳습니다.





최근 북한은 '우리식 경제관리방법'(관련기사 참조) 등 자신들의 새로운 경제조치를 내놓고 있습니다. 협동농장에서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거나, 공장에서 생산 및 판매를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조치가 북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시간이 지나야만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어떻게 진행될지, 정치학적 분석이나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북한을 파악하는 데 주요한 판단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