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연변 지역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통일에 관심을 갖고 여러 학교에서 모인 학생들이 함께했습니다. 북중접경지역을 답사하는 여러 프로그램 중에서도, 연변 지역을 중점적으로 답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5회에 걸쳐 연변지역 특집기획, "연변, 어디까지 가봤니?"를 연재합니다. [기획특집] 연변, 어디까지 가봤니? ①북중러 접경지역, 훈춘 (클릭!) ②한국대학생-연변대학생 간담회 (클릭!) ③백두산(북파) (클릭!) ④유일한 통일인(統一人), 김진경 (클릭!) ⑤만주침탈의 중심, 간도총영사관 |
1909년, 일제는 간도협약을 통해 만주 지역을 중국에 할양하는 대신, 조선 회령에서 청나라 길림까지 이어지는 철도부설권을 얻어냈습니다. 오늘날 연변의 중심은 연길이지만 당시 연변의 중심은 조선인들이 대거 거주하던 용정(龍井; 룡정)이었습니다. 일제는 용정 등 간도 지역의 몇개 지역을 개방도시로 지정하고 연변에서의 영사재판권까지 청나라로부터 이양받았습니다. 일제는 간도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1907년 용정에 설치했던 "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영사관"(이하 간도총영사관)으로 확대발전시킵니다. 간도총영사관은 이후 간도 및 만주지역의 통제 및 독립운동 저지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간도일본총영사관
간도일본총영사관 내부. 연변지역 답게 조선어(한국어)와 한어가 병기되어있다.
간도일본총영사관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에게는 '소가죽 한 장의 이야기'로 무척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간도에 총영사관을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간도에 파견된 일본 영사는 당시 청나라 관리에게 영사관을 지을 땅을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 영사는 청나라 관리에게 소가죽 한 장 만큼의 땅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고, 청나라 관리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알겠노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청나라 관리가 일본 총영사관을 방문해보니, 영사관이 지어진 땅이 소가죽 한장보다 훨씬 넓고 건물 또한 으리으리했습니다. 화가 난 청나라 관리는 일본 영사에게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따져물었고, 일본 영사는 부하들에게 소가죽 한 장을 가지고 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이 가져온 소가죽은 가위로 실처럼 길게 잘려있었고, 일본 영사는 그 둘레를 합하면 땅의 둘레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족 사회에 아직도 남아 일본의 간사함에 대한 분노와 민족애를 동시에 자극하고 있었습니다.
소 가죽 이야기. 오른쪽은 가위로 잘게 잘린 소 가죽 모형
그런데 간도총영사관의 이름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간도총영사관은 통감부간도파출소를 확대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통감부간도파출소는 일제 내무성 관할로 식민지조선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영토로 이해된 것이나, 간도일본총영사관은 일제 외무성 관할로 청나라에 설치한 '영사관'이 된 것입니다. 자주권을 잃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역사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은 곳곳에 밀랍인형을 설치해, 영사관을 관람하는 내내 기묘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어놓았다.
간도총영사관이 간도와 만주지역에 대한 침략을 기획했던 것을 증명하는 가장 큰 사건이 바로 '훈춘사건'입니다. 고등학교 역사 근대 부분에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본래 영사관은 해외의 자국민을 위한 각종 조치를 취하는 곳이므로, 경찰밖에 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만주 지역에 군인이 반드시 필요하였고, 기에 군대를 파견하기 위한 사건을 조작합니다.
1920년 일제는 만주 지역에 있던 마적단을 매수하고, 일본 낭인을 참모직으로 동행시켜 훈춘을 습격하게 합니다. 이것이 훈춘사건입니다. 400여 명의 마적단은 1920년 9월 12일 훈춘을 습격하여, 은행을 약탈하고 약 200여 채의 가옥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다시 훈춘을 공격하여 일본영사관 분관에 불을 지르고, 중국인 수십 명, 일본인 십여 명 등을 살해하는 한편, 온 도시에 불을 지르고 200여 명을 인질로 잡아갔습니다.
일제는 10월 하순 훈춘사건을 핑계삼아 일본군 2만 명을 연변으로 보내, 마적단 소탕을 빌미로 독립군 및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시작합니다. 간도 전 지역에서 조선인들이 무작정 살해되었으며, 그 숫자는 공식적으로 3000여 명이고 비공식적으로는 몇 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것이 ‘간도참변(간도학살, 경신참변; 중국명 경신년대토벌)’입니다. 이 학살에 맞서 일어난 무장독립 전쟁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입니다.
한가롭게 당구치는 모습을 촬영한 일제 군인들
간도총영사관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여러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22년 반일무장투쟁으로 몽땅 전소된 후 재건된 용정일본총영사관은, 1937년 폐관될 때까지 약 2만여 명의 항일인사를 고문했습니다. 지하고문실에서 피해 받은 사람은 4,000여 명이며, 1,000여 명은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기도 했습니다. 용정의 ‘3․13유혈사건’, ‘간도공산당검거사건’, ‘8․7유혈사건’ 등에 대한 토벌은 간도총영사관에서 기획하고 자행된 사건들입니다.
중국은 일제강점기 연변지역에서 일제가 자행한 범죄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기록을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 조선족들의 경험을 촬영하여 남겨두었다. 전화기를 들면 화면에 나오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그대로 보존된 지하고문실. 잔인하고 끔찍한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어있어, 꺼려지는 사람은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다.
간도총영사관 근처에 있는 명동촌 윤동주 생가. 입구가 공사중이었다
용정에 있는 3.13 반일의사릉. 3.13운동은 3.1운동의 여파로 연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연변에서는 일제에 저항한 것을 '항일'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반일'이라고 표현한다.
간도총영사관전시관은 2015년 11월 3일에 1차 공사 마무리로 개관한 이후 3차 공사까지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 곳을 둘러봄으로써 당시 역사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는 한편, 연변 지역의 조선족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변을 방문하실 기회가 있다면, 한 번 들러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추재훈
추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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