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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독일 통일전문가 초청<통일, 시민사회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워크숍



  지난 8월 29일, 평화재단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주최한 협력 워크숍이 <통일, 시민사회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뜨거운 관심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패널로는 독일인 두 명, 우리나라 사람 두 명이 참가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의 도움으로 미리 통일을 경험했던 독일의 두 전문가 분이 참여했습니다. 먼저 '프란치스카 리히터씨'(Franziska Richter)는 독일 사민당 베를린포럼의 사회통합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리히터씨는 동독에서 태어나 13살 때 독일이 통일되어 동독과 서독이 통합되는 것을 지켜보며 이 분야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의 동독정치교육국장을 지낸 또 다른 전문가인 '우베 치글러'(Uwe Ziegler)씨는 리히터씨와는 달리 서독 사람으로 동독의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서독 사회에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측에서는 전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이자 현 평화재단 평화연구원이신 고경빈씨와 평화재단 평화연구원 팀장인 이새롭씨가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 소장인 '스벤 슈베어젠스키'(Sven Schwersensky)씨의 진행으로 좌담회 형식의 워크숍이 진행되었습니다.  


△진행자와 4명의 패널들


진행자는 고경빈씨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독일이 통일한지 2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민 사회는 왜 독일 통일에 관심을 갖는가?”

고경빈씨의 간단한 대답은 “부러워서” 였습니다. 독일은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뤘으나 지난 25년간 한반도는 통일에서 멀어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정책을 힘 있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여론의 힘이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대북정책 관련 여론은 점점 양극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언급하여 안타까움을 표현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프란치스카 리히터씨에게 향했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지 25년이 지난 지금, 독일의 통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리히터씨는 아직도 독일은 통합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답했습니다. 통일은 장기적 프로젝트이고 정치 엘리트들만의 프로젝트가 아니며 시민들이 주도해서 달성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독일 통일이 성공적이었으나 너무 빨리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지난 25년을 되돌아 볼 때, 서독 시스템을 동독에 그대로 이식했는데, 이것이 과연 잘 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높다고 합니다. 리히터씨는 이를 재미있는 비유를 통해 설명했는데요, 동독이 서독이 사는 집 안에 이사 오도록 했을 때 이미 가구가 배치된 집에 그냥 이사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리모델링을 고려해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진행자도 동독과 서독이 같이 살 집을 함께 설계하고 계획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며 동의했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이새롭씨에게 향했습니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은 서로 얼마나 잘 알고 있나요?”

이새롭씨는 ‘북한’이라고 하면 보통 ‘정치범 수용소, 3대세습, 열악한 인권, 심각한 기아, 가난하다’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직접 만날 일이 없어서 언론을 통해 위와 같은 이미지를 접하는데, 이것이 북한의 실체라기보다는 대부분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전파된 것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이 실상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진행자는 이새롭씨의 답변과 연관하여 우베 치글러씨에게 질문을 이어 던졌습니다. 

 

“서독와 동독에 서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우세했던 시기가 있었나요?”

우베 치글러씨는 냉전시기에는 두 독일이 국제 정세에 영향을 받아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나뉘어 체제 경쟁을 벌였다고 말했습니다.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더 가속화되었는데, 치글러씨는 지금 한국의 상황이 독일의 1961년 상황보다는 낫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케네디가 냉전을 지속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 정세가 바뀌지 시작했습니다. 또한 독일에도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와 경제적 필요성의 분위기를 타고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펼치면서 통일에 대한 분위기가 시민사회에도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다 찬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에게도 동방정책이 그들에게 경제적 이득을 준다는 인식이 강화되자 동방정책의 유지가 가능했습니다. 즉, 독일 통일은 국제정세, 국내정치, 그리고 경제의 3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져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독일어를 통역해 준 동시 통역기


진행자는 빌리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에서 유대인 희생 기념비를 찾아 무릎을 꿇는 것 때문에 해외에서 인기가 많은데, 그가 통일보다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논조로 연설을 했었던 것은 덜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베 치글러씨에게 “서독 사회가 민주화된 것이 통일에 더 도움이 되었는가?”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치글러씨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통일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부터 독일의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고 서독 사회가 열린 사회가 되면서 젊은이들이 시민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는데, 이것이 강한 서독 사회를 만들고 건강한 기반을 세우게 했다고 역설했습니다. 


진행자는 이어 “한국의 젊은 세대는 통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고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새롭씨는 한국의 젊은 세대가 ‘남 걱정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통일에 대해서 내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하기 어려운 시기라는 것입니다. 리히터씨도 한국 청년의 어려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며,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독일에서도 80년대 말에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동독 출신으로서, 통일 이후에 서독에 가서 살았는데, 서독 사람들이 동독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으며 동독인들이 서독에 들어 닥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놀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상호간에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같이 사는 것에 대하여 서로 어떠한 이득이 있는지 알아야 좋다는 것입니다. 두 독일도 서로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단계별로 진행된 정치적 통일에 비해 내적 통합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리히터씨는 ‘통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민 한 명 한 명이 같이 살게 될 사람들에 대해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북한 이탈주민이 한국에 많이 사는데, 북한이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 알려줄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대해 고경빈씨는 그들의 체험이 단편적이며,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의 증언 중에서 듣고 싶은 부분만 골라 듣는 문제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한 시민은 ‘현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치글러씨는 ‘시민사회’를 모든 사회 구성원으로 본다면 사실 적극적으로 정부에게 통일하라고 강요하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서독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나라 사람들과 같이 당장 나의 일이 바쁘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사회’을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과 같이 정당을 지원하는 독립적인 정치 재단으로 협소하게 정의한다면, 동독과 서독의 이질화를 막기 위해 상호간에 소통과 교류를 가능하게 노력했었다고 합니다. 치글러씨가 한 일과 같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는 또한 “동독 사람들은 통일로 향하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습니다. 

리히터씨는 동독이 사회주의 통일당의 1당 독재 시스템이었으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시민들이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교회의 보호 안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의견의 표출 기회가 있었고, 인권운동 등이 교회의 보호 아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80년대에 동독의 삶의 터전이 훼손되고 체르노빌 사건도 발생하자 ‘환경운동’도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민사회에서의 개별적인 운동들이 교회 안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점점 커지고 힘을 얻게 되면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북한의 상황과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 시민이 ‘서독 정부는 서독으로 건너 온 동독인들에 대하여 어떤 정책을 실시했는가?’라고 질문을 했는데, 리히터씨는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답했습니다. 서독은 법적으로 동독을 독립되게 보지 않았으므로 제도적으로 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서독으로 온 동독인들은 서독인들과 동일한 권리를 자동으로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북한과 우리보다 두 독일의 이질성이 더 적었을 것입니다. 정보 교류의 기회가 지속적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답들을 듣다 보니 어느새 워크숍을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통일 당시의 상황과 우리의 현 상황은 분명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통일 선배인 동독과 서독 출신의 패널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홍다혜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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