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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대학생기자가 추천하는 통일여행지, 국립4.19민주묘지

△ 4월학생혁명기념탑 (출처: 국립4.19민주묘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 대한민국 헌법 전문


 통일부는 4.19이후 사회 각계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다양한 통일논의를 정부차원에서 수렴하여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통일정책을 수립·추진하기 위해 ……

- 통일부 설립목

 

지난 3월, 통일부 창설 기념일(1969년 3월 1일 통일부 전신인 국토통일원 개원)을 맞이하여 통일부 홈페이지에 접속해 통일부의 설립목적을 찾아보았습니다. 통일부의 설립목적에 4.19혁명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호기심이 생겼고, 며칠 동안 이 의미에 대해 의논을 해보았습니다. 여러 번의 의논을 통해 통일부와 4.19혁명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한국의 모습에 대해 취재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4.19혁명에 대해 몸소 느껴보기 위해 저희는 국립4.19민주묘지를 직접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통일부의 연혁 및 역사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도 찾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저희는 4.19혁명과 통일부, 그리고 통일한국의 모습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같이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실까요?

 

△ 국립4.19민주묘지 앞    △ 통일부 설립목적 (출처: 통일부 홈페이지)

 

 4.19혁명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입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4.19혁명 이전부터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했습니다. 이런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은 1956년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 이에 불안해진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 및 실행했습니다.

대구2.28학생의거를 시작으로 마산3.15의거와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열사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4월 18일에는 고대생 피습사건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고, 4월 19일 학생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경무대(청와대 이전 명칭)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일반시민들이 가담하면서 시위대열의 규모가 점차 커졌고, 시위대는 경무대 앞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에게 무력을 행사하며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결국 4월 19일 이후로 국민들의 분노와 혁명에 대한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전국민의 궐기를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 조현기 기자    △ 묵념하는 조현기 기자

 

 4.19혁명과 국토통일원

앞서 통일부 설립 목적에서 나온 것처럼 4.19이후 사회 각계에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통일논의가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학생을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4월혁명 이념에 대해 고민하던 학생들은 '통일'이야말로 4월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논의가 점차 확산되어 1961년 5월 5일에는 17개 대학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가 개최되고, 이곳에서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통일 논의는 5.16군사정변으로 4.19혁명 이후 통일운동의 열기는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많은 국민들이 지속적으로 통일을 열망했습니다. 이에 국회는 국토통일연구특별위원회의 보고서인 통일백서를 통해 1967년 2월, 통일문제를 종합적이고 전문적으로 다룰 전담기구를 정부 내에 설치하고, 국무위원을 조직의 책임자로 임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회는 1968년 7월 정부조직법 개정(법률 제2041호)을 실시하였습니다. 정부는 국회에 통과된 법에 따라 1969년 1월 국토통일원직제(대통령령 제3574호)를 공포하였습니다. 이런 법적인 절차를 거쳐 통일부의 전신인 국토통일원은 1969년 3월 1일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4.19혁명은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다양한 통일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이런 국민적인 열망을 국회와 정부는 수렴하였고, 국토통일원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통일부가 탄생한 결정적인 계기는 4.19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묵념하는 김창균 기자    △ 김창균 기자

 

 한국 민주주의와 함께 성장한 통일부   '민주주의 성장 -> 통일논의 성장 -> 통일부 성장'

4.19이후에도 우리 국민들은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를 성장시켰습니다. 이런 민주화운동의 흐름 뒤에는 항상 통일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어 우리 사회의 통일에 대한 의식과 논의 역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민주화운동 이후, 활발한 통일운동이 뒤따르는 이유는 많은 국민들이 우리 사회의 목표가 '통일'이며, 통일이 되어야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국토통일원 역시 개원한 이후 규모가 계속 커졌습니다. 1990년에는 국토통일원에서 통일원으로 격상되었고 1998년에는 통일부로 개편되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현재 통일부는 200여 명에 이르는 공무원 규모, 통일교육원, 하나원, 남북회담본부, 남북출입사무소, 남북교류협력협의사무소 등 다양한 소속기관을 가진 통일업무를 전담하는 중앙행정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4.19이후 국토통일원이 개원하였고, 6월 항쟁이후 국토통일원에서 통일원으로 격상되는 흐름을 보았을 때,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과 함께 통일부도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성장 -> 통일논의 성장 -> 통일부 성장') 이처럼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성장과정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열망 분출했고, 이런 국민의 열망을 반영하여 정부는 지속적으로 통일과 관련된 정부 조직들을 확대 및 발전시켰습니다. 즉,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통일부를 성장시킨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많은 국민들은 이전보다 통일에 대해 적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통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서 통일문제는 침체되며 동시에 통일부의 성장 역시 침체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통일은 국민의 의지와 지지를 통해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통일에 대한 의지를 우리 스스로, 그리고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라고 생각합니다.

 

△ 자유·민주·정의를 꽃피운 아름다운 민주성지 '4.19국립묘지'

 

   자유 · 민주 · 정의 정신을 계승하는 통일 한국

올해 4.19혁명 54주년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하여 여야의 수많은 관계자들은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국립4.19민주묘지에 방문한 사람들은 '4.19정신을 계승하고 앞으로도 계속 생각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계승하겠다고 말한 4.19정신은 어떤 정신일까요?

남북으로 분단이 된 이후부터 많은 사람들은 통일 한국이 어떤 국가가 되어야 되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원하는 통일 한국의 모습이 4.19정신에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양함을 이해하는 한국',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민주주의 한국', '약자를 배려하고 불의에 맞서는 정의로운 한국', 이런 멋있는 통일 한국을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정의가 살아 숨 쉬는 멋진 통일한국을 기대하며, 지금까지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조현기, 김창균 기자였습니다!

 

 

※ '국립4.19민주묘지 가는 방법'

 

 

[참고자료]

통일부 홈페이지

국립4.19민주묘지 홈페이지

▷ 4.19혁명 홈페이지

▷ 한민족대백과 '국토통일원'

▷ 연합뉴스 2014년 4월 19일 기사, 여야 "4·19혁명 민주주의 정신 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