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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의 수도, 평양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수도는 한 나라의 중앙기관이 있는 정치적 활동의 중심지인 만큼 그 중요성이 매우 큽니다. 특히 북한의 수도인 평양은 4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비록 현재 한반도는 잠시 분단되어있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북이 하나였던 시간이 훨씬 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였던 시절로 돌아가 역사 속의 평양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평양 시내▲ 평양 시내 (사진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1078&cid=756&categoryId=4365)   ▲ 평양 대동강▲ 평양 대동강 (사진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1081&cid=756&categoryId=4365)

 

 '평양'이라는 이름은 평평한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버들이 우거진 곳이라 ‘류경’이라고도 부릅니다. 평양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6년 9월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평양특별시로 승격되었으며 그 후 평양직할시가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인 평양의 면적은 북한 땅의 0.9%에 해당하는 약 1,100㎢로, 평양시민의 인구는 약 286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의 면적은 약 605㎢이고 서울시민의 인구는 약 1,020만 명인데 반해 면적은 넓고, 상주하는 인구는 적은 편이지요.

  ‘조선중앙연감 2011’에 따르면, 평양의 행정구역은 여러 번의 개편을 거쳐 18개 구역과 2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평양시의 중심은 중구역이며, 1950년대 이후로 인민대학습당, 만수대 예술극장, 평양학생소년궁전 등 특색 있는 건축물과 구소련 양식을 닮은 건물들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인민대학습당 앞에는 김일성광장이 있으며, 근처에 주체사상탑이 세워져있는데 이는 평양의 상징이랍니다. 한편, 북한에서는 평양을 ‘혁명의 수도’라고도 부른답니다. 북한에서는 공민등록법 규정으로 '17세 이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은 공민증을 발급받는데, 1997년부터 평양 시민은 '평양 시민증'을 발급받아 다른 지역 주민들에 비해 특혜를 받고 있습니다.

 

 중심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낮은 구릉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평야가 많아서 농업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평양은 옛날부터 살기 좋고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서울과 함께 한 국가의 수도였던 만큼 그 중요성은 매우 크지요. 지금부터 역사 속 평양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여러분, 고인돌 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바로 고인돌은 우리나라에서도 청동기 문화가 발전했음을 알려주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랍니다. 그렇다면 청동기시대 전, 선사시대에는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까요? 정답은 평양에 있는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유적’에서 찾을 수 있답니다. 약 60만~4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지는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실재하였음을 입증해주는데,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지도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검은모루유적▲ 검은모루유적 (사진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68002&cid=831&categoryId=831)   ▲ 평양성 대동문▲ 평양성 대동문 (사진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4669&cid=4513&categoryId=4513)

 

  여러학설이 많지만 단군조선 이후 기자, 위만조선 시기에 세운 수도인 왕검성이 평양 부근이라는 것은 학계에서 공인되고 있습니다. 그후 기원전 2세기 말 한나라의 동방 정책으로 잠시 낙랑군이 설치되긴 했지만, 압록강 중류에서 국가의 틀을 갖춰가기 시작한 고구려가 점차 남쪽으로 국토를 확장하면서 낙랑군을 축출하게 되었고 마침내 313년 미천왕 때 이 지역은 고구려에 영속되었습니다.

 

  한반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국내성에 수도를 둔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위해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평양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약 24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로 번성하였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지만, 곧 통일신라에 영속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건국 후 태조 왕건은 도읍을 개경(현재 개성)으로 삼았지만, 서경(평양)을 북진정책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천도까지 계획하기도 했답니다. 그 후 문벌귀족 시기인 1135년, 묘청이 주도가 되어 풍수지리를 근거로 서경으로의 천도와 정금자주 정책을 주장하는 서경천도운동이 있었습니다. 

 서경천도운동의 실패로 인해 각종 조치가 취해지고 황폐해진 평양 지역은 평안도 평양부로 개편되었으며, 세종의 사민정책으로 인해 인구도 점차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피난을 뒤쫓던 왜군과 병자호란 때 점령한 후금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후 영조 때 재건 정책으로 인해 평양은 서북지역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청나라와 중개무역을 하는 ‘유상’이 발달해 번성했습니다.

 

▲ 물산장려운동▲ 물산장려운동 (사진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86351&cid=831&categoryId=831)   ▲ 과거 평양시내▲ 과거 평양시내 (사진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208662)

 

  근대에 들어서며 평양 지역은 상업적으로 더욱 활성화되었으며, 서구문물 수용에 있어서 보다 개방적이기 때문에 많은 개화파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한편, 서양의 개항 요구가 끊임없었던 1866년, 서양세력이 군사력을 앞세워 개항을 요구하자 강력히 대항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제너럴셔먼호 사건’입니다. 대동강을 거슬러온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난폭한 행위를 일삼자 평양감사 박규수와 평양 군민들이 화공으로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몰살시켰는데, 이 사건은 이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20년대에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대항하여 ‘물산장려운동’이 펼쳐졌는데, 바로 평양에서 시작되었답니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지도자들이 1920년 7월 20일, 평양에서 조선 물산장려회 발기인 대회를 가진데서 시작된 이 운동은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 동명왕릉▲ 동명왕릉 (사진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4615&cid=1590&categoryId=1590)   ▲ 을밀대▲ 을밀대 (사진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0689&cid=1630&categoryId=1630)

 

 과거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 평양의 역사 속에는 한반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평양에는 고구려를 포함한 여러 유적이 특히 많습니다. 대표적 유적으로 동명왕릉, 평양성의 대동문과 을밀대, 그리고 호남리 사신총 등이 있지요. 평양의 역사를 보면 그 속에서 남북이 분단된 시간은 비교도 안될 만큼 매우 짧습니다. 그만큼 남과 북이 함께해온 시간이 정말 긴 것이지요. 우리 역사 유적지를 실제로 보지 못하고, 교과서 속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참 아픕니다. 비록 지금은 자유롭게 평양을 비롯한 북한 땅을 밟을 순 없지만, 곧 머지않아 평양으로 소풍가서 여러 유적지도 보고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남과 북이 다시 함께하는 그 날이 오길 바라며, 이상 6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한솔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