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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88올림픽 25주년 기념] (2)스포츠와 한반도

1988년 서울올림픽!


(출처 : 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207/26653_54842_917.jpg)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서울은 나고야와의 경쟁 끝에 올림픽 유치권을 획득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의 우려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IOC의 위험한 도박”이라는 표현으로 서울의 올림픽 개최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성공적으로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으며, 서울올림픽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http://z.enha.kr/pds/e/e6/1988010101.jpghttp://pds25.egloos.com/pds/201208/09/02/f0024002_5023ba0cdf2f8.jpg

  먼저 이전에 개최되었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서방국가들이 보이콧하여 반쪽짜리 올림픽이라는 오명을 받았습니다. 서방국가들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는 이유로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 했습니다. 뒤이어 열린 1984년 LA 올림픽에는 반대로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함으로써 반쪽올림픽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에 드디어 동서 양 진영의 국가들이 대거 참가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은 23개 종목, 237개 경기에 159개국 1만 3304명의 선수·임원단이 참가한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의 대회였습니다. 또한 소련과 동독이라는 나라가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 대회이도 했습니다. 때문에 서울올림픽을 탈냉전의 첫 번째 국제 이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북 스포츠 교류의 역사


  분단 이후에도 남북은 꾸준히 스포츠 교류를 위한 대화를 진행해왔습니다. 1958년에는 북한 올림픽위원회가 로마 올림픽에 단일팀을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남한에서 국가보안법이 발효되는 관계로 논의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최초의 남북 간 스포츠 교류를 위한 대화는 1972년 뮌헨 올림픽 때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한체육회 김택수 회장과 북한 올림픽위원회 오현주 위원장이 만났지만 뚜렷한 결과를 도출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렇듯 60, 70년대에는 스포츠 교류를 위한 시도는 있었으나 의미있는 진전은 없었습니다.


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모습 (출처 : http://archivenew.vop.co.kr/images/2002-09/1644ww.jpg)


  그러나 80년대 이후 탈냉전의 바람이 불면서부터는 남북 간의 스포츠 협력도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스포츠 협력에는 88년의 서울올림픽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1990년 경평축구대회의 부활이 그 신호탄이었습니다. 1990년은 소위 1차 북핵위기로 인해 남북관계가 엄청난 긴장 속에 놓여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은 경평축구대회를 부활시키기로 합의하고 1990년 10월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경기가 치러졌습니다. 


최초로 남북 단일팀을 꾸렸던 리분희(왼쪽), 현정화(오른쪽) 선수 (출처 : http://www.koreadaily.com/_data/article_img/2012/06/21/140956921.jpg)


  남북통일축구대회를 발판삼아 1991년에는 최초의 남북 단일팀이 구성됩니다. 영화 ‘코리아’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이 참가해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의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또한 1999년에는 남북통일농구대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열리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통일농구대회는 금강산 관광문제와 당시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동시입장하는 남북 선수단 (출처 : http://www.kimunyong.com/upload/2000%EB%85%84%20%EC%8B%9C%EB%93%9C%EB%8B%88%EC%98%AC%EB%A6%BC%ED%94%BD%EB%8C%80%ED%9A%8C%20%EA%B0%9C%ED%9A%8C%EC%8B%9D%20%EB%82%A8%EB%B6%81%EB%8F%99%EC%8B%9C%EC%9E%85%EC%9E%A5.jpg)


  한편 2000년대 들어서는 국제대회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입장하면서 전 세계에 남북의 교류를 과시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남북 선수단이 KOREA라는 이름으로 공동입장 했습니다. 분단국이 올림픽에서 공동으로 입장한 것 역시 올림픽 사상 최초라고 합니다. 이어 남북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5년 마카오 동아시아게임,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2007년 창춘 동계아시안게임까지 연이어 공동으로 입장했습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스포츠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 걸린 태극기 (출처 : http://img.yonhapnews.co.kr/photo/yna/YH/2013/09/14/PYH2013091403180001300_P2.jpg)


  한동안 남북의 스포츠 교류는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스포츠 교류에 있어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지난 7월에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는 북한이 여자부 경기에 참가해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또한 지난 9월에는 북한의 장웅 IOC위원이 북한의 마식령 스키장을 평창올림픽 때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9월 13일부터 북한에서 열린 아시안컵 및 아시아 클럽대항 역도선수권대회에 한국 선수단이 참가했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평양에서 열린 공식행사에서는 처음으로 애국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북정책의 첫 단추는 상호 신뢰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스포츠가 상호신뢰의 첫 단추가 되었듯이, 적극적인 남북 스포츠 교류가 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mejunate@nate.com

구희상




[참고자료]

김동선, 2001, “우리나라 통일과정에서 스포츠교류의 역할-독일 통일과정의 함의”, 『한국체육학회지』 제40권 제2호.

http://www.c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806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514429&cloc=olink|article|default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41708393972147&type=1&outlink=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78615&mobile&mobile&cid=200000000&categoryId=200000686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71914343374966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3/09/03/20130903004893.html?OutUrl=naver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644289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7528122&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