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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88올림픽 25주년 기념] (1) 스포츠와 독일 통일


(출처 : http://imgnews.naver.net/image/144/2013/09/30/l_2013093002001269500333011_59_20130930161602.jpg)


  지난 9월 24일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88올림픽 25주년 기념 탁구 경기가 방송되었습니다. 특히 이날 25년 만에 재대결을 한 김택수, 유남규 선수의 경기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 ‘코리아’의 주인공인 현정화 감독도 출연해 88올림픽에 관한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88올림픽 25주년을 맞은 올해, 전국에서는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스포츠와 정치?



(출처 : http://www.ultramarathonman.com/newsletter/Pheidippides_LG.jpg)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은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을 지향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올림픽에서 정치적 표현은 철저히 금지되고 있습니다. 지난 런던올림픽에서 박종우 선수의 독도 세리머니도 FIFA가 금지하는 정치적 표현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스포츠는 비정치적이며 또한 그래야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스포츠는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왔으며, 또한 정치적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올림픽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 올림픽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경기는 고대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 승리하자 한 병사가 40km를 달려 아테네에 도착해 승전보를 알리고 절명했다는 전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대로 페르시아의 뒤를 이은 이란은 자국의 패배를 기념해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서독 스포츠 교류의 역사


  독일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의 스포츠 교류는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독일올림픽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1950년 12월에는 ‘독일스포츠연맹’이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1950년대 초에는 몇몇 종목에서 동서독 단일팀을 구성해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http://postfiles15.naver.net/20121202_206/heyday1601_1354414252253ChNTs_JPEG/berlinredbluejpg.jpg?type=w2)

  물론 스포츠를 사이에 두고 동서독 간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처음엔 스포츠 교류에 소극적이던 동독이 이를 자국의 선전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노선을 급선회합니다. 동독 정부가 노골적으로 스포츠를 정치적 수단으로 삼으려했던 반면, 동독의 적극적 태도를 대비하지 못한 서독은 스포츠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배제하기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 8월과 1952년 월 까지만 해도 동서독 간 약 700회의 친선경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7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1961년까지 동서독은 3971회의 스포츠 회동을 하고, 8만 2361명이 스포츠 경기에 참가하는 등 활발히 교류를 해왔습니다. 


동서독의 올림픽


  1954년 서독은 나토(NATO)에, 1955년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습니다. 이로써 전 지구적 냉전이 시작되었음은 물론이고, 동서독 간의 대립도 심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60년 로마 올림픽, 1964년 도쿄 올림픽에 단일팀을 파견함으로써 끈끈한 스포츠교류를 과시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는 동서독이 각각 출전했습니다. 동독은 뮌헨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스포츠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뮌헨 올림픽을 계기로 다소간 소원했었던 동서독의 스포츠 교류가 물꼬를 트기 시작했습니다.





뮌헨 올림픽 엠블렘(왼쪽)과 개막식의 모습(오른쪽)
(출처 : http://www.mapsofworld.com/olympics/trivia/images/olympic-emblem/munich1972.gif, http://www.totalprosports.com/wp-content/uploads/2011/08/1972-olympics-595x390.jpg)


  하지만 이후 서방국가들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이에 대응해 공산국가들도 1984년 LA 올림픽에 불참합니다. 이 같은 진영 갈등으로 인해 동서독의 교류도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987년부터 동서독은 각 도시들이 서로 자매결연을 맺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그 중심에 스포츠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한 스포츠 교류의 증가 또한 결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mejunate@nate.com

구희상




[참고자료]

송병록, 2004, “스포츠와 정치: 동·서독 스포츠 교류가 남·북한 통합에 주는 함의”, 『한·독사회과학논총』 제14권 제2호.

http://reviewstar.hankooki.com/Article/ArticleView.php?WEB_GSNO=10141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