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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이산가족, 그 슬픔의 역사를 보며

 

 

 

이산가족, 그 슬픔의 역사를 보며. 


 

 지난 2010년 10월 제17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있었다. 칠칠치 못한 코흘리개라 매일 콧잔등을 닦아 주었다던 동생이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며 울부짖는 한 노인을 보며 당시 우리 가족은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우리가족에게 이산가족 상봉은 의미가 다른 사람 보다 더 특별한데, 우리 가족 또한 이산(離散)의 아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친형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강제징용을 당하셨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할아버지는 친 형을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당시 사할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미국, 영국 함께한 체결한 '얄타협약'으로 인하여 소련으로 넘어간 상태였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형의 생사도 모른 채 50년을 살아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90년 당시 TV에서 방영되었던 사할린 재외동포의 가족 찾기 행사를 통해 할아버지는 큰 할아버지의 생사를 반 백년만에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만나고 싶으셨을까. 당시 TV를 보고 있던 할아버지께서 "저거, 우리 형이야 우리 형!!!"이라고 목놓아 부르셨던 그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께서는 50년 만에 극적으로 해후를 하셨다. 큰 할아버지는 이역 만리 우크라이나에서 사시고 계셨는데, 해방 이후 무국적자로 살다 우여곡절 끝에 소련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의 일환에 따라 그곳에 정착하셨다고 한다.

 

 일주일간의 만남을 뒤로 하고 큰 할아버지는 우크라이나로 돌아 가셨는데 너무 늦게 상봉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서야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났기 때문일까. 그렇게 우크라이나로 돌아간 큰 할아버지는 정확히 20일이 지나고 운명하셨다. 그 후 친할아버지도 뒤따라 운명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천국에서 형과 못 다한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어 기쁘다" 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어릴 적의 경험이라 그런지 현재 큰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억 나지 않는다. 당시 큰 할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셨던 고양이가 그려진 소련제 티셔츠를 보며 그날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릴 뿐이다.  이런 가족의 역사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는 이산가족 상봉 찾기 행사를 볼 때마다 그 일이 남일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산가족 상봉은 언제부터 이루어 졌을까? 이렇게 가족끼리 흩어져 수십 년을 슬픔 속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은 현재 얼마나 되는가? 이산가족 상봉, 언제 끝나게 될 것인가? 지금부터 이산가족 상봉, 그 슬픔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이산가족의 역사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한국전쟁 또는 한반도 분단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서로 소식을 전하거나 상봉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양측 적십자사간의 합의에 의하여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 교환 행사가 이루어졌다.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은 1985년 9월 20일 ~ 9월 23일에 그 떨리는 만남을 가졌으며, 이후 중단 상태로 있다가 2000년 다시 재개 되었다.



현재 이산가족은 얼마나 되는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2011년 4월말 기준 총 128,532명이라고 한다. 이 중 47,344명이 이미 돌아가시고, 81,198분이 생존해 계신다. 연령대별로는 70대 이상 고령자가 78.5%를 차지하고 있으며, 해마다 4,5천명의 이산가족이 고령으로 돌아가시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산가족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나 역시 일전의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만감이 교차 했다. 그들이 친지의 생사를 확인하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만 북한과 평화 통일을 이루지 않는 이상 어차피 또 다시 기약 없는 헤어짐을 해야만 하는 그들에게 어떻게 보면 '이산가족 상봉'은 고통의 연장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현재 한국과 북한은 서로 소통 할 수 있는 '길'이 뚤려 있지 않다.  인적 하나 없는 산에도 사람이 자주 왕래 하면 하나의 '길'이 만들어 지듯이 우리는 자주 소통하여 먼저 '상생의 길'을 만들어야만 한다.  '상생의 길'을 타고 경제적인 통일, 마침내 한민족의 평화통일을 이룬다면 우리의 슬픔의 역사였던 ‘이산가족 상봉’은 이제 종결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루 빨리 민족의 상처가 치유 되었으면. . . . 

 

 

 





통일부 상생기자단 4기

최영훈 기자

(justine127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