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친왕 혁흔> 당시 청나라의 의정왕대신 공친왕 혁흔은 베이징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넘겼는데 이때 조선의 녹둔도가 함께 딸려가게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1860년 11월 베이징의 자금성. 당시 청나라의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은 제2차 아편전쟁의 종결을 위하여 온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의 사신들에게 둘러싸인 채 마침내 중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조약문건에 도장을 찍고야 말았다. 이 조약이 바로 베이징조약이다.
이 베이징조약으로 인하여 영국은 홍콩이 있는 주룽(九龍)반도를 차지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몰수된 기독교 재산의 반환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재를 알선해줬다는 명분으로 우수리 강 이동(以東)의 땅, 연해주를 챙기게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에게 연해주 일대를 이양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베이징조약과 전혀 무관한 나라의 땅이 얼떨결에 연해주와 함께 러시아로 편입돼버린 것이다. 그 땅은 바로 조선의 영토, 녹둔도(鹿屯島)였다.
<녹둔도의 위치와 오늘날의 모습> 출처 : 두산백과
허나 오늘날 지도 속 녹둔도의 모습은 이름과는 달리 섬(島)이 아닌 뭍(陸)이다. 19세기 초 퇴적작용으로 인해 그 북쪽이 연해주 일대와 붙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와의 기존국경에 혼동이 일어났고 결국 베이징조약에 의하여 얼떨결에 러시아의 영토가 되고 만 것이다.
이후 1889년에 이르러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 러시아에 항의하였으나 그만 국제사회의 냉엄한 힘의 논리에 의하여 묵살되고 말았다.
<녹둔도의 현황> 현재 녹둔도에는 러시아가 쌓은 제방과 함께 러시아의 군사기지가 있다.
출처 : 러, 녹둔도(두만강변 조선땅)에 제방 쌓고…, 동아일보 (06.11.22)
녹둔도의 이러한 비극은 현대에 이르러 북한체제에 의하여 더욱 극명해지고 말았다. 지난 1990년 북한이 구소련과 경계를 설정할 때에 베이징조약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음에 따라 녹둔도 일대를 구소련의 영토로 인정하고 만 것이다.
현재 러시아는 2004년 이후 북한과의 경계지역에 대한 경비강화를 까닭으로 녹둔도 남쪽에 제방을 쌓았으며 군사기지까지도 세워놓았다.
관련전문가들은 통일 이후 우리가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와 맺은 경계에의 조약과 관행들을 그대로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통일 이후에도 녹둔도가 타향살이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마땅히 우리의 당당한 영토이어야 할 녹둔도! 향후 통일 한국시대에도 녹둔도가 타향살이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이 생겨서는 당연히 아니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일을 미연에 막기 위하여 남북은 이에 관한 긴밀한 협력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북한체제가 우리와 대화의 국면에 들어서게 되는 것으로 우리가 내미는 상생공영의 손길을 부여잡는 것을 뜻한다.
조상들이 물려준 삼천리의 금수강산. 이 보배로운 땅이 '상생공영의 통일'로 나아가는 협력으로써 지켜져 마침내 위대한 통일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게 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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