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6일,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2012 Asia Archaeology (아시아 고고학) 국제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주관 단체인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외공동연구기관이 수행한 국외유적 조사/연구의 성과를 정리하여 국내학계에 소개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특히 수원대학교 사학과의 양정석 교수는 ‘북한 소재 고구려/발해 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여 청중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양정석 교수의 발표를 바탕으로 남한 학계의 북한 소재 고구려/발해 유적 조사 및 연구 현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통일의 당위성을 도출해보려 합니다.
자료 접근 수준에 따른 인식의 변화
양정석 교수는 우선 북한 소재 고구려/발해 유적에 대한 남한 고고학계의 연구 현황에 대해 발표하였는데요, 그는 1945년 이후부터 2012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한 고고학계의 연구가 북한 소재 고구려/발해 유적에 대한 자료 접근 수준에 따라 인식이 바뀌었다고 하며, 자료 접근 수준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1) 자료 간접 접근기 (1945 ~ 1980)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남과 북을 가르는 3.8선이 생겼습니다. 사실상 분단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이때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남한 학자들이 간접적으로 자료를 확보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남북 간의 교류가 거의 없이 모든 정보가 단절되었기에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구려/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 성과를 직접적으로 확인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고, 따라서 주로 일본과 중국 등 제3국에서 정리한 연구사적 검토에 의지하여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안악고분 벽화 -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이 시기에 해당했던 1949년, 북한에서는 황해도 안악고분군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북한 최초의 역사고고학적 성과로서 유명하였으나, 얼마의 시간이 흘러 실제로 분단 전 안악고분군을 조사했던 남한 학자에 의해 기존 남한 학계에 알려진 북한 학계의 조사결과와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분단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 자료 직접 접근기 (1980 ~ 2000)
1980년대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학술 개방이 시작되면서 발굴 보고서, 연구서, 학술잡지 등 북한의 고고유적 조사 및 연구에 대한 각종 자료가 소개되고, 그중 일부는 국내에서 출판 및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구를 재검토하는 분위기가 형성이 됩니다. 물론 이 시기 북한의 한국사 연구 성과는 남한의 그것과는 수준이나 내용 면에 있어 차이가 있었기에 남한 학계에 많은 괴리감을 안기기도 하였으나, 기존의 분단사학을 극복하고 통일사학을 지향하면서 그 접합점을 찾고자 노력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남북 공동 자료 작성 시기
고구려와 관련하여 남한과 북한의 학술교류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93년 중국의 지안 시에서 개최된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회의는 해외한민족연구소와 조선일보사, 중국의 조선사연구회가 주최하여 비록 남북 간 합의에 의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남측, 북측,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지의 많은 학자들이 참석한 학술대회였습니다. 이 학술대회는 문화유산과 관련한 남북의 학자들이 직접 대면한 학술회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를 매개로 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연결고리를 만들어온 남북의 학계는 2000년 들어서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며 남북관계가 진전되자 본격적인 남북교류협력의 장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성과가 바로 2002년 10월에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남북한 공동학술회의 –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공동 학술토론회’였습니다. 여기서는 남북 역사학자 5명이 참가하여 모두 1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남북한 역사학자간의 견해 차이를 더욱 좁히고 통일에 대비한 역사인식 마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양 고구려 왕궁 안학궁 터 - 출처: 한겨레)
(3D 영상으로 복완한 고구려 안학궁 - 출처: 세계일보)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고대사 왜곡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 역사왜곡 시도가 북한의 고구려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류 결정, 중국 집안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과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남북 학계에서는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에 2005년 고구려연구재단(동북아역사재단의 전신)과 북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에 의해 평양 일대 고구려유적 남북 공동 학술조사가 추진되어 평양 일대의 벽화고분과 성곽 유적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북측 고구려 유적에 대한 남북 공동 발굴 조사로 발전하여 2006년에는 고구려연구재단,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공동으로 고구려의 왕궁이었던 안학궁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이 조사는 남측의 연구자들이 평양으로 직접 가서 북측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발굴 조사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통일사학’을 지향해야 한다
이처럼 남한 학계의 북한 소재 고구려/발해 유적 조사 및 연구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자료 접근 시기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그에 따라 학계의 연구도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화해무드가 조성이 되면 활발한 교류와 협력으로 적극적인 조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남북관계 상황에 따라 연구의 지속성을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공식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여전히 우리의 북방 고대사에 대한 왜곡 작업은 꾸준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부분 고구려/발해 유적이 남한보다 북한에 더 많이 소재하고 있고, 영토적 연고성도 떨어지는 남한으로서는 북한의 이러한 유적 발굴과 학술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만약 북한이 중국의 입장에 동조하게 된다면 고구려의 독자성과 한민족의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는 한국의 주장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민족의 발자취이며 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중국의 고대사 왜곡이 갈수록 심화되는 지금 이 시점, 우리 역사학계 역시 ‘분단사학’을 극복하고 ‘통일사학’을 지향해야할 때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까지 남북관계의 상황에 따라 연구의 지속성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우리 학계가 누구의 간섭과 방해, 협조를 구할 필요 없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조사, 연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한반도 통일의 당위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루 빨리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이루어져 남북공동발굴이라는 이름이 아닌 ‘국내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정체성을 되찾아주기를 기원합니다.
이상으로 상생기자단 5기 김경준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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