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밤은 그야말로 형형색색이다. 지난날 청나라 말의 굴욕적인 역사의 상처 따위는 그 흔적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야말로 찬란했던 과거 중화문명의 화려한 부활이다.
그러나 북한의 평양은 형형색색의 베이징과는 달리 아직도 잿빛에 머물러 있다. 쇠락의 길을 택한 평양과 번영의 길을 택한 베이징. 이러한 양상을 목도한 평양은 베이징에 대하여 질투를 품게 되었다.
베이징을 향한 평양의 질투 - 北-中관계의 위기
베이징이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 것은 덩샤오핑(鄧小平) 덕분이다. 1977년부터 집권한 그는 이른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1과 도광양회(韜光養晦) 2의 실용적이고 웅대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서방세계에 대한 개방과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으로 이어졌고 중화는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덩샤오핑(左)과 오늘날의 선전(深圳)경제특구(右)>
덩샤오핑의 적극적인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은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중화의 부흥’을 이루었다.
덩샤오핑, 선전경제특구 출처 : Wikipedia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행보에 한 체제는 큰 질투를 표현했으니 바로 지난날의 혈맹, 북한이다. 중국이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정책의 실시를 선포한지 이틀 뒤 북한은 ‘우리 식대로 살자!’라는 이른바 자력갱생의 구호를 내놓으며 이를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92년 8월 24일. 중국에 대한 북한의 질투는 극에 달하게 되었으니 대한민국과 중국이 수교하게 된 것이었다. 안 그래도 1991년 12월 25일 공산진영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무너진 상황에서 중국의 이러한 행동은 북한의 ‘뒤통수를 치는 것’과 다름없었고, 이에 북한은 수교가 맺어진 해의 9월 베이징에서 양국의 정상회담이 열리자 중국을 향하여 ‘제국주의에 굴복한 변절자이자 배신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한중수교를 맺은 바로 다음 달 베이징에서 한-중 양국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에 북한은 중국을 비난하며 크게 질투하였다.
출처 : 덩샤오핑 ‘남조선영도소조’ 정체는?, 중앙일보 (2011년 8월 23일)
뿐만 아니라 중국은 북한에 대하여 1949년 정식교류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하여오던 ‘우호가격제’를 폐지하고 국제가격제의 실시와 함께 현금 결제를 요구하였다.
우호가격제란 상대방에게 물품을 국제가격의 절반 이하로 공급하는 일종의 가격상한제이다. 이러한 중국의 조치에 북한은 90년대 초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큰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북-중관계의 파국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장’을 택하는 길로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고 1993년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으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하였다. 큰 형님 소련은 죽은 지 오래고 덩치 큰 죽마고우 중국과도 소원해지니 기댈 것이라곤 핵무기라는 흉기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을 넘기며 북한의 경제상황이 점점 붕괴되는 와중에 장쩌민이 김정일에게 손을 내밀게 되면서 북한과 중국의 어색해진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4부 ‘티베트 독립에 왜 북한이 반대하나?’에서 계속 됩니다.
※ 참고자료
1. 대륙의 지도자 등소평, 등용, 북스토리 (2004년)
2. 경제학 콘서트, 팀 하포드, 웅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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