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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北中관계 변천사 (2)] 미국을 무찔러 조선을 구하라!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戰爭)!
 이 낱말은 일본을 무찔러 조선을 구한 전쟁이란 뜻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우리가 말하는 임진왜란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무찔러() 구해준() 전쟁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미국을 무찔러 조선을 구한 전쟁인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다.


미국을 무찔러 조선을 구하라! - 北-中관계의 발전

 한국전쟁 초기 불리했던 전황을 이겨내고 마침내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목전에 두게 되기에 이르렀다. 통일이 실현되는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25일, 무려 30만이나 되는 중공군이 만주로부터 갑자기 쳐들어왔다. 마오쩌둥을 도와 중국을 적화시킨 주역이었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지도 아래 진격해온 그들은 순식간에 전황을 역전시켜 126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서울과 수원을 점령했다.


<중공격멸의 노래>
공보처에서 직접 중공격멸의 노래를 만들었고,
무찌르자! 오랑캐!’라는 노래가 유행할 만큼 중공군의 개입은 우리에게 큰 위기였다.
출처 : 중공격멸의 노래, 동아일보 (195128)

 이렇듯 중공군의 개입으로 자유진영의 위기가 도래하자 심기일전한 국군과 UN군은 다시 반격에 나서 그 유명한 원산폭격을 감행하였고, 19513월에는 다시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은 무려 전체병력의 1/3에 이르는 10만이 전사하였고 마오쩌둥의 맏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 전사하였다.

 이렇듯 한국전쟁에 큰 획을 그은 중공군.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왜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개입한 것일까? 단순히 북한이 국공내전 시기부터의 혈맹이기 때문이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의 현실적 까닭들이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 포스터>
왼쪽의 포스터 아래에 적힌 항미원조 보가위국
미국을 무찔러 조선을 구하고 집과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
오른쪽의 포스터에는 미국침략자필패라 적혀있다.
출처 : 한국전쟁 아픔 중공군 포스터 발견, 강원일보 (2011625)

 우선 당시 중국이 사회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비록 중국이 대륙을 장악하기는 하였으나 바다건너의 대만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 정권이 들어선 상태였고, 내부에서도 그 국민당 정부를 따르는 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마치 지난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에 반대하는 영주들에 대한 타개책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듯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었다.

 또한 중국은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생정권인 그들에게는 자력으로 이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이에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을 꺼려하는 소련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대가로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얻어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홍콩의 정치학자 서택영(徐澤英)씨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대가로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중공군의 100개 사단을 소련의 첨단무기로 무장케 하는 등의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받았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당시는 막 냉전체제가 출범한 시기였다. 따라서 자유진영인 대한민국과 직접적으로 경계를 접하게 될 경우 자기네 체제의 안정에 큰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중국은 북한을 완충지대로 남게 하려고 하였다.


<서택영(徐澤榮, David Tsui) 박사>
그는 자신의 옥스퍼드대학논문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미 정해진 사안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민해방군의 기밀자료를 인용하였다 하여 1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처 : 중공군, 한국전 참전 두 달 전 이미 전쟁예산 짜, 중앙일보 (2011113)

 그렇다면 중국은 언제부터 이와 같은 개입을 계획했던 것일까서택영 박사는 자신의 옥스퍼드대학 논문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을 통하여 중공군의 개입은 개입 두 달 전부터 이미 확정된 사안이었으며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개입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이미 중국은 전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19501월에 대한민국에서 정부수집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조선족 통역요원 2,000여 명을 미리 개입대기부대에 배치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 꿍꿍이속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중국은 북한의 체제유지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는 북한과 중국 서로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혈맹이라는 인식을 더욱 공고히 하게 하였다. 하지만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이후에도 늘 이러한 순항이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3부 '베이징을 향한 평양의 질투' 에서 계속 됩니다.

※ 참고자료

1. 한국전쟁에서의 중국의 역할(中国在朝鲜战争中的角色),  서택영(徐澤榮), 프린스턴대학 (2010년)
* 중국 웹싸이트 豆丁을 통하여 알아냈음을 밝힘.
2. 군과 나, 백선엽, 시대정신 (2009)
3. 중공군, 한국전 참전 두 달 전 이미 전쟁예산 짜, 중앙일보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