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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독일 통일의 배경 - 화해와 협력 vs 힘의 우위

  우리나라는 독일의 사례를 가장 이상적인 통일로 여긴다. 독일은 평화통일을 이루고, 이를 동력으로 삼아 빠르게 경제를 재건했다. 여기에 더해 독일은 세계대전의 악몽을 떠올리던 주변국들의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며 이제는 명실상부한 유럽의 리더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독일 통일의 성공적 사례를 보면서 부러움과 동시에 통일이 가져다줄 풍요를 기대한다. 이처럼 통일 문제와 관련한 독일 배우기 열풍에 대해 독일의 학자들은 한국이 독일의 통일에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통일의 롤 모델인 독일의 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이 독일 통일의 직접적 원인이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서독의 동독에 대한 힘의 우위가 통일의 배경이라는 것이 우세하다고 한다. 물론 이 두 가지 입장이 완전히 상충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것이 더 통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고민은 똑같이 분단을 겪고 있는 우리의 통일 정책에도 큰 교훈을 줄 것이다.


통일독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게이트 (출처 -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68088&menuId=-1&listType=3&from=&to=&curPage=6&logId=4297885)


신(新)동방정책

  1969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사민당-자유당 연정을 시작하면서 ‘신동방정책’을 내세운다. 신동방정책은 ‘접근을 통한 변화’를 기본으로 동독,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는 정책이다. 신동방정책의 핵심은 동독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었다. 서독은 1민족 2국가를 인정함으로써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기대했다. 동독의 지도자들은 관계 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정권이 인정받길 바랐는데, 서독이 흡수통일의 가능성을 포기하자 서독과의 더 많은 교류를 허용하였다. 동독 역시 서독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얻어냄으로써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시키려 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 (출처 : http://www.nemopan.com/board/762254/page/108)


  엄밀히 말해서 독일의 통일은 서독의 흡수통일이다. 동독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결정하여 통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 20년 동안의 적극적인 화해협력 정책이 없었다면 동독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동독의 경제는 사회주의권 최고의 복지수준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파탄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서독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마침 서독이 동방정책을 펴면서 자신들을 인정하자 그 대가로 교류와 협력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이에 따라 동독인들이 서독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면서 동독의 점진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서독의 동독에 대한 포용정책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독일의 통일에 있어서는 독일 내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전승국의 동의와 주변국의 우려도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독이 동독을 인정하는 태도는 동구권 국가들에게까지도 이어져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 체코의 수데텐 지방 포기, 오데르-나이세 국경선 인정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독일은 과거 나치의 행적을 철저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변국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결국 신동방정책의 기본 개념인 ‘다름의 인정’이 독일 내부 관계는 물론이고 동구권 국가들 간의 관계도 발전시켜 통일을 향한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왼쪽부터) 헬무트 콜, 고르바초프, 조지 부시 (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1130192006&Section=05&page=2)


힘의 우위

  독일 통일의 배경은 사민당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이 아니라 그 이전 기민당 아데나워 수상의 ‘힘의 우위’정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먼저 통일의 결과에 주목하는데, 독일의 통일은 동독 주민들의 시위에 의해 동독 정권이 붕괴되었고 또한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원해서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것이라고 한다. 즉 모든 방면에서의 서독의 우월함이 동독인들로 하여금 서독을 동경하게끔 만든 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서독인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매우 낮았고,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민족주의를 부추긴다고 하여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반대로 동독인들의 서독에 대한 동경은 정권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했다. 이런 점에서 신동방정책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한 것이 아니라 분단 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봐야한다.


아데나워 총리 (출처 : http://kk1234ang.egloos.com/2468405)


  독일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2차 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했다. 그 중에서도 동독을 점령하고 있었던 소련의 태도가 중요했는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독일 통일에 탄력을 주었다. 그러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도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완성시킨 소련에 대한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것이다. 미소간의 데탕트 역시 미국의 힘이 더 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미국을 등에 업은 서독 또한 동독에 대해 모든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서독이 지속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고, 힘의 우위에 있는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자 주변국들을 설득하기도 더욱 쉬웠던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주장처럼 독일 통일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독일 역시 통일을 완성해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뜻이다. 물론 독일의 통일을 바라보는 두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새겨야할 것은 독일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일관된 내독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통일의 주역인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콜은 각각 사민당, 기민당 출신이었다. 독일은 정권이 바뀜에도 불구하고 이전 정권의 정책노선을 정치적인 이유로 급선회하지 않았다. 반면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의 기조가 조금씩 바뀜에 따라 정책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일의 통일도 성숙해지고 있고 동시에 통일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독일이라는 좋은 사례를 바탕으로 우리도 일관된 대북정책을 펼쳐야할 때이다. 



[참고자료]
염돈재,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서울: 평화문제연구소, 2011)
신인화, "냉전기 동서독관계와 현재 남북관계의 비교: 서독의 신동방정책을 중심으로", 『유럽연구』, 제26권 2호(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