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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제9기 대학생 북한 전문가 아카데미 (2) 염돈재 원장의 '독일 통일의 교훈'

  지난 5월 18일에 열린 대학생 북한 전문가 아카데미에서는 ‘독일 통일의 교훈과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이라는 주제로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의 강의가 있었다. 염원장은 국정원 공채 출신으로 참여정부 시절에 제1차장을 지냈다. 특히 독일파견 시절에 독일의 통일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을 설명해주었다. 

 

염돈재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


독일의 통일과정

  사실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당시 동독은 공산권 제1의 공업국이었으며 비밀경찰 슈타지(Stasi)의 철저한 감시로 별다른 민주화 요구도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독일의 통일은 2차 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동독에는 소련군 38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인접국인 프랑스 역시 독일이 통일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독일이 좋다. 그래서 독일이 두 개 있는 것이 좋다.

-프랑소와 모리약


  1989년 7월에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철거한 것을 계기로 동독주민들의 대량탈출이 시작되었다. 매일 약 2천여 명이 탈출하면서 동독의 사회기능은 마비상태에 이르렀고, 서독 TV의 영향으로 시위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결국 1989년 10월 18일에 동독 서기장 호네커가 사임하고 개혁성향의 크렌츠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11월 9일에 공보담당 정치국원 사보프스키가 원래는 여행규제 완화계획을 발표하려고 했으나 실수로 국경을 전면 개방하겠다고 발표해버리고 만다. 이를 듣고 국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탓에 국경이 전면 개방되고 베를린장벽도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동독의회는 1990년 10월 2일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소멸’을 의결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동독이 해체되고 10월 3일에 독일 통일을 선포했다. 


붕괴된 베를린 장벽

독일통일의 성공 요인

  이렇듯 통일의 성공사례로 일컬어지는 독일 통일의 성공 배경에는 어떠한 요소들이 있을까? 염 원장은 직접적 요인과 장기적 요인을 아래와 같이 구분해서 분석했다.


◆ 직접적 요인

①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

② 동독경제의 파탄

③ 서독정부의 과감하고 적절한 조치(미국을 설득)

④ 미국의 적극적 지원


◆ 장기적 요인

① 서독이 동독 주민의 동경 대상이 됨(서독TV시청)

② 원칙을 고수한 서독의 대 동독정책

③ 철저한 과거청산으로 주변국의 신뢰확보



독일의 통일 비용

  독일정부가 공식적으로 통일비용 지출내역을 발표한 것은 단 한 번뿐이다. 자세한 내역을 살펴보면 1991년에서 2003년까지의 통일비용 중에서 가장 많은 지출은 연금, 노동시장 보조비 등의 사회보장성 지출로 전체 통일비용의 49.2%를 차지했다. 반면 인프라를 재건하는데 쓰인 비용은 12.5%에 불과했다.

  이 통일비용이 어떻게 조달되었는지에 대한 내역은 역시 1991년과 1992년에 단 두 번 발표되었다. 자세한 내역은 아래와 같다.


연도

세금·보험료
인상

정부지출
삭감

공채발행,
재정차입

공기업
매각 등

1991

196.5
(13.6%)

370
(17%)

1,500
(68.9%) 

12
(0.6%)

2,178.5
(100%)

1992

282.5
(10.65%)

360
(13.5%)

1,942
(73%)

75
(2.85%)

2,659.5
(100%)

주요 항목별 통일비용 조달내역(1991~1992)     (단위: 억 DM)


  위의 조달내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통일비용의 70%가량은 공채발행 및 재정차입을 통해 조달했다. 반면에 세금 및 보험료 인상 등 주민들에게 직접 부과된 통일비용은 약 10%정도이다. 예를 들어, 월 5,000마르크의 월 소득을 가진 4인 가족이 있다면 그들이 통일 후 추가 부담한 직·간접세는 월 100마르크 정도인데, 통일 당시의 환율로는 약 5만원, 비율은 총 소득의 2%정도에 불과하다. 이를 보면 개인의 통일비용 부담을 걱정하는 것은 기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네커 서기장

독일 통일과 관련된 논쟁

  독일의 통일과 관련해서 아직도 많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염원장은 그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독일 통일에서 교훈을 얻고자 했다.


독일통일은 화해협력의 결실 vs '힘의 우위 정책'의 결과

  독일에서는 통일이 서독의 '힘의 우위'정책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힘의 우위라는 말이 꼭 군사적 힘의 우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도덕,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동독보다 더 우위에 있겠다는 말이다. 이러한 정책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서독정부는 친미·친서방 노선을 고수하면서 경제재건에 주력했다.

  위에서 제시한대로 독일통일의 성공요인 중 하나는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련의 변화도 1980년대 초 레이건의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화해정책과 나토의 강화라는 힘의 우위가 성공을 거둔 탓이다. 염원장은 이렇게 서독, 그리고 미국이 각각 동독과 소련에 대해 힘의 우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은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르바초프(왼쪽)와 레이건(오른쪽)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은가?

  국내에서는 흡수통일이 기피해야 할 통일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서독의 흡수통일로 동독 주민들이 서독체제에 적응하는데 시일이 걸렸으며 2등국민 의식이 자리 잡아 심리적 고통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흡수통일은 동독 주민들이 스스로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가 동독의 체제나 제도 중에 계승해야할 요소가 거의 없다고 판단해서 서독으로의 가입을 원했던 것이다.

  한편 염원장은 대등한 입장에서는 갈등과 이해관계 조정이 어렵기 때문에 통일이 더 어렵다고 한다. 실례로 남북 예멘은 통일에 합의하고도 70일 간의 내전을 겪은 후 완전히 통일되었다. 염원장은 만약 우리가 북한과 대등한 통일을 하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을 양보하고 그들의 어떤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분단 위기에 놓인 예멘

 

독일 통일의 교훈과 시사점

  염원장은 북한주민이 스스로 체제를 결정하거나 정권을 바꿀 수 없다면 통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 대책을 제시했다.

1. 대한민국을 북한 주민들의 동경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최근 한류가 북한에까지 퍼지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신호라고 할 수 있겠다.

2. 우리 스스로 굳건한 안보태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3. 북한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북한인권 문제에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4. 대북 경제지원이 독재정권 강화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닌지 그 투명성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5.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분단 후유증'을 명심하면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염돈재 원장

  북한인권학생연대가 주최하는 대학생 북한전문가 아카데미는 현재 9기째를 맞고 있다. 9기 강의는 금요일 대흥역 4번 출구에 위치한 한국경영자총연합회관 5층에서 진행된다. 북한인권학생연대는 북한인권영상제 등 북한 인권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하반기에 북한전문가 아카데미 10기가 진행될 예정이니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