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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통일의 길목] 첫걸음, 전쟁기념관을 가다

안녕하세요. 제5기 상생기자단 진성민 첫인사 올립니다. 예년에 비해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5월 9일, 저는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하였습니다. 통일의 길목에서, 호국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제 스스로의 다짐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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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무력남침을 결정했다. 왼쪽부터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1945년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새 시대를 축복하던 기쁨도 잠시, 이내 좌우익의 갈등으로 남북은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남북갈등의 최고정점 이었던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부터 38선에서 포화가 시작되어, 이후 3년간 진행된 그야말로 치유하기 어려운 민족적 비극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은 3년간 계속된 전쟁기간 중 처음 1년 동안은 치열한 전투로 얼룩졌으나 후반 2년간은 지루한 휴전협상을 진행하면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에서 남북 간에 끊임없는 살육행위가 무자비하게 전개된 잔인한 전쟁이었습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미·소간의 냉전체제가 뜨거운 열전으로 변화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전쟁기념관은 희생된 선열들의 위대한 공훈과 호국정신을 선양하고, 전쟁의 교훈을 통해 전쟁 예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쟁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보존·연구·전시하고 있다.


1994년 6월 10일에 개관한 이곳 전쟁기념관에는 그날의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놓여있습니다. 차마, 물러설 수 없었던 전쟁. 그러나 우리 민족끼리, 우리 땅에서 벌어진 무차별한 살육전.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참전 등. 약소국이기에 겪어야했던 우리 민족의 비애와 함께 호국선열들의 정신이 깃든 곳입니다.


전쟁 속으로

'그들이 열망하던 조국이 과연 이러한 분단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들이 지금의 분단된 조국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생각들이 들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고, 고작 더위에 땀을 흘리는 제 자신이지만 그들의 거친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몰입하였습니다.


▲피로 물든 낙동강, 후퇴는 곧 죽음이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북한군으로 낙동강에 몰린 국군은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우세한 공군력과 지상화력으로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막아내면서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고,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전투는 군인, 경찰, 학생, 노무자, 여성들도 참전한 그야말로 국민 총력전이었습니다.


▲미국에 맥아더 장군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백선엽 장군이 있었다.


전선이 매우 불리했던 그때, 다부동 전투에서 사단장의 신분으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고 명령한 뒤 최전선에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데 앞장섰던 백선엽 장군은 그의 말처럼 조국을 지키고자 했던 호국선열들의 비장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학도의용군의 이름으로 참전한 학도들은 한국전쟁 전기간에 걸쳐 2만 7700여 명에 이른다.


한국전쟁은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았던 국가의 운명 앞에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총력전이었습니다. 이는 어린 소년들조차 예외일 수가 없었는데요. 권상우와 탑이 주연한 영화 '포화속으로'가 오버랩 되면서 어린 소년들이 겪었을 그날의 공포와 고통들이 가슴 깊숙이 전해졌습니다. 특히, 제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았던 한 편지를 소개합니다.


▲이 글을 쓴 이우근 학도병은 다음날 포항여중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반격, 그러나

▲수세를 벗어난 반격, 1950년 9월 15일 결행된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한 혈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편, 전격적으로 결행된 '인천상륙작전'은 서울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 공산군 주력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어버림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승리의 상징이었던 평양탈환


이러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서울을 탈환(1950.9.28)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으로 진격,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절체절명의 수세 속에서 이루어낸 통일에 대한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평양을 탈환하던 날의 감동이 전시물을 통해 저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중공군 40만 명이 참전,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 만주를 눈앞에 바라보는 압록강 기슭 혜산진에 도달하여 감격에 벅차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기도 잠시, 중국은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김일성을 돕기 위해 소위, 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팽덕회가 지휘하는 중국군 정예부대 40만 명을 파병하였고,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확전을 경계한 미국과 중국, 이후 2년간의 소모전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세가 어려워진 국군과 유엔군은 소위, '1.4후퇴'라는 이름으로 북한 전역에서 후퇴하였고,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내주고 수원까지 퇴각하였습니다. 이후 51년 3월 재차 서울을 탈환하였으나 더 이상의 확전을 경계했던 미국과 중국은 현 진지를 고수토록 명령하였고, 한국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있기까지 명분 없는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 되었습니다.


나오면서

북한의 무력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통일은커녕 소기의 목적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 그에 따른 이산가족과 실향민 그리고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습니다. 민족의 숙원이었던 남북통일은 잔혹한 전쟁을 통해서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족적인 실망과 슬픔만이 남은 것입니다.


▲한국전쟁은 민족의 막대한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낳았다.


이렇듯 한국전쟁은 남북한에 깊은 상처와 함께 중요한 '교훈' 또한 남겼습니다.

첫째, '민족 내부에서 결코 전쟁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둘째, 전쟁을 억지하려면 강력한 '국방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셋째, 한반도가 다시는 '전쟁터'로 변해서는 안되겠다는 교훈이었습니다.

넷째, 주변의 '국제정치 상황'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인식이 필요하다는 교훈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은 선택이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금의 통일에 대한 무관심은 젊은 나이에 순국했던 호국선열들 앞에 저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와는 무관하다는 생각들로 외면해 버리는 우리들을 전쟁에서 순국한 젊은 영웅들은 과연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조국이 과연 지금의 현실이었을까요?

물론 우리 세대들은 통일조국을 경험해 본적도 없고, 전쟁을 겪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밟고 있는 지금 이 땅이 결코 우연이 아닌, 불과 60여 년 전에 있었던 치열한 혈투의 결과이고, 통일은 전세대가 마땅히 이룩해야할 사명임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겪었던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없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 또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아니, 이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통일'입니다.

이상, 통일의 길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