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도 펑크 록커가 있었다?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 전시 정보를 처음 발견하자마자 왠지 모를 흥분에 휩싸였다. 고등학교 때 한창 빠져 있던 록음악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나기도 했지만, 북한과 펑크 록이라는 신선한 조합이 마음 속 어딘가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리라.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북한 사회. 하지만 평양 어딘가 비밀스런 지하 공연장에서는 저항적인 가사가 담긴 펑크 록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상상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직접 전시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북촌 아트선재센터로 향했다.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은 신인작가에게 기회를 주는 아트선재 오픈콜의 첫번째 공연으로, '더 아웅다웅스'가 기획하고 서울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아트선재센터에서의 작품 전시(3/17~4/18)와 세 차례의 공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리성웅의 탄생 - 활약 - 몰락을 주제로 하는 공연들은 무려 10팀의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특이한 점은 공연 뿐 아니라 전시물 또한 각 밴드들이 직접 만든 작품이라는 것.
티켓을 구매하자 어딘지 북한 포스터 냄새가 나는 브로셔와 '성'이라고 쓰여 있는 뱃지를 받았다. 짐작하겠지만 '성'은 리성웅의 이름 가운뎃글자로, '리'와 '웅'이 새겨진 뱃지도 있다. 기타 피크 모양의 이 뱃지를 달면 리성웅 라이브 공연에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어두컴컴한 전시장에 올라가자 가공의 인물 리성웅의 삶을 담은, 이름처럼 '탄생''활약''몰락'이 담겨 있는 전시물들이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전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
탄생(誕生) 3월 16일 ~ 3월 26일
1. 레닌그라드에서 보낸 유학시절(遊學時節) 그의 아파트 앞을 흐르던 강 - 밴드 <쾅 프로그램 >
2. 유년시절,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떠났던 팔보산(八宝山)의 온천 - <팔보야마>
공연 - 3/23 (금) 저녁 7시
활약(活躍) 3월 27일 ~ 4월 05일
3. 함경북도 회령의 산 아래 숨겨져 있는 그의 해적(海賊) 라디오 방송국 「외곽전철」- <노컨트롤>
4. 북(北)의 오렌지족(族)인 놀새족 행세를 하며 기거했던 평양시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빌라 「Taedong Diplo」- <서교그룹사운드>
5. 그의 연주(演奏)가 흘러나왔다는 함경도 근처의 한 블루스 술집 - <악어들>
공연 - 4/01 (일) 저녁 7시
몰락(沒落) 4월 06일 ~ 4월 15일
6. 고난(苦難)의 행군(行軍) 시절, 산속에 은둔한 그의 광기(狂氣) - <무키무키 만만수>
7. 비사회주의(非社會主義) 단속(團束)에 의해 처참(悽慘)하게 유린(蹂躪)된 그의 인권(人權) - <밤섬 해적단>
8. 일기를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인간 리성웅 내면의 이야기 - <파렴치악단>
9.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자라나는 리성웅 키드들의 아지트「노동당사」 - <파블로프>
공연 - 4/13 (금) 저녁 7시
전시물들은 모두 전시장에 자리하고 있지만 분기에 따라 조명 등을 달리하여 색다른 효과를 주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인간 리성웅.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북한에서는 치료 목적으로 주로 쓰인다는 온천. 리성웅 역시 몸이 좋지 않았던 어린 시절 온천치료를 위해 요양을 떠났을 것이다. 실제로 차 있는 물에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반사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비밀스레 펑크 록을 연주하던 리성웅. 그는 어쩌면 개인 장비로 해적 라디오 방송을 운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방송국의 이름은 외곽전철. 어둠 속에서 전구 하나에 의지해 어지럽게 쌓인 장비들을 조작하던 리성웅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강남에 오렌지족이 있다면 북한에는 놀새족이 있다. 고급차를 몰고 달러와 엔화를 쓰며 휘황찬란한 평양의 밤거리를 즐기는 놀새들. 하지만 그들 역시 어항 속에 갇힌 한 마리의 금붕어일 뿐이다. 놀새 리성웅 역시 고급 빌라 Taedong Diplo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내지만 체제의 울타리 속에서 그의 영혼은 자유롭지 못하다.
함경도 근처의 한 술집. 블루스가 흘러나오곤 하는 그곳에서 리성웅의 펑크 록도 들어볼 수 있었을까. 클럽의 구석에는 천장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꽃으로 장식된 피아노가 한 대. TV로 끊임없이 재생해주던 북한 음악 프로의 녹화 영상도 그의 연주가 시작되면 잠시 숨을 죽였을 것이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산으로 도망쳐야 했던 시절. 급하게 꾸린 그의 은신처는 역시나 악기들로 가득하다. 타향의 악기를 들여올 때는 어떻게든 변형을 거쳐야 하기에, 기묘한 모습을 한 악기들은 북한 사회의 억압을 뚫고 반항적인 음악을 해 나가던 리성웅의 모습을 닮은 듯 하다.
결국 단속에 의해 수감되고 만 리성웅. 그와 함께 갇힌 악기들은 남았지만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비사회주의라는 미명 하에 원하는 음악을 할 자유마저 유린당한 그는 한 무더기의 압수품들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췄다.
음악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티셔츠, 도서 등 리성웅이 빼앗긴 물건들은 다양하다. 남한에서는 몇 푼의 돈만 있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품들이 이곳에서는 부정한 물건으로 낙인찍혀 압수의 대상이 되었다.
남겨진 리성웅의 일기장. "남조선 괴뢰도당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소련정부와 남조선의 관계가 일떠서고 있다..." 그의 생각들이 담긴 일기장이 뒤늦게 발견되면서 리성웅에 대한 재해석이 일어나고 있다. 어디에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속시원히 털어놓던 그만의 공간. 리성웅, 생각보다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진정한 개인으로 거듭나는 그의 모습이 한 장 한장 세세히 녹아 있다.
리성웅을 기억하는 이들. 그의 삶에 매료된 이들이 다음 세대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아지트 노동당사. 이곳에 모이는 소년들 중에 미래의 또 다른 리성웅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시를 다 보고 나니 리성웅,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이념에 관계없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음악이란 소재를 통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한 인간의 삶을 조명하고, 체제와 한 인간 사이의 비극을 보여준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 그를 이해할수록 북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 속의 그는 감시와 억압 속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록커 리성웅은 음악이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유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이든 북이든 그들 모두가 나와 다르지 않은 한 명 한명의 사람이라는 생각. 분단의 고통에서의 탈출구도 그러한 상호 이해와 수용으로부터 오지 않을까.
마음맞는 기자단 동기와 이런저런 깊은 생각을 하면서, 즐겁게 관람한 전시인 만큼 통일에 관심이 있는 모든이들에게 전시를 추천하며 기사를 마치려 한다. 모두들 각자의 리성웅을 생각하면서, 통일에 대해, 북한에 대해 무한한 상상을 하고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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