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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그의 용기 <황장엽의 회고록>


2010년 10월 10일. 전 조선노동당 비서를 지냈던 황장엽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이다. 당시 언론에선 북한의 최고 고위층 망명자였던 그가 사망한 사실을 연일 보도하곤 했다. 2008년 가을, 황장엽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던 덕분일까? 그의 죽음이 남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 故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

그리곤 1년이 지난 지금, 황장엽 선생님이 살아왔던 과거, 그리고 그가 꿈꿨던 밝은 한반도의 미래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의 삶을 담은 <황장엽의 회고록>. 지금부터 그 속으로 들어가보려 한다.


▲ 망명당시모습


그의 회고록은 망명 당시 상황설명으로 시작된다. 그는 1997년 7월에 남한으로 망명했다. 망명은 황장엽 선생에게 곧 모험과도 같았다. 높은 직급에 있었던 그였기에 보호라는 이름으로 늘 따라다니던 감시요원이 있었고, 그들을 벗어나 한국대사관에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망명 사실이 중간에 들통났을 때, 북에 있는 가족에 영향이 갈까봐 자진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늘 독약을 상비하고 있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망명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망명이유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사실 북한 정권이 금방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그리고 통일을 이뤄 북한 인민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북한 정권은 붕괴되지 않았으며, 북한 인민들을 살릴 수도 없었다.



▲ 故 황장엽 전 비서의 가족 사진

그러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의 망명이 가족을 저버릴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과감히 민족을 위해 망명을 한 황장엽 선생, 그 자신이 결국에 가족을 사지로 몬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장엽 선생의 가족은 현재 수용소에 수감돼있다. 그러나 가족의 희생을 무릅썼음에도 북한 인민들을 살리는 목표에 결국 도달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책을 읽어나가면서 서서히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 자신 또한 복잡한 감정에 놓여있었음을 말이다. 대의를 위해 가족을 등지고 북한을 나왔지만, 황장엽 선생은 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시에 그는 지식인으로서 점점 자신이 만든 주체사상의 근본원리가 김일성, 김정일 개인 숭배로 가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감과 분노 또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 반대의 말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그는 인정하기도 했다.

사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부분에 나는 무척 놀랐다. 학자로서 자신이 만든 이론과 걸어온 행적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오 앞에 자존심을 챙긴 것이 아닌 잘못임을 인정한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한국에 정착 후 10년 동안, 자신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북한 정권의 부조리를 알리고 인민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온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또한 올바른 통일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던 점에도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 故 황장엽 전 비서

살아있는 역사의 산 증인이었던 황장엽 선생.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더이상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를 당부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양성과 개인의 존중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민족, 인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단일성이 부족하다. 그러니 이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되 목표를 향해 같이 달리는 단일성을 갖추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이다.

그의 충고대로 평화적 통일이라는 큰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그가 꿈꿨던 인민들의 인권과 경제가 보장되어 있는 시대가 도달해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그는 미래의 평화로운 한반도를 못 보지만 말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고치려 노력하는 삶을 살다간 황장엽 선생. <황장엽의 회고록>은 바로  잘못을 인정한 그의 용기를 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