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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북한 반(反)평화 범죄 중단을 위한 국제사회의 역할 ②

 

 

"북한 반인도 반평화 범죄 중단을 위한 국제사회의 역할"

 

반인도 범죄 피해자 증언 (탈북자, 일본인)

 

 

 

 

기조 연설에 이어 곧바로 반인도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첫번째 순서는 차혜리(가명)의 증언이었습니다.

 

 

 

  

차혜리(가명), 1967년 생,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 공장 노동자, 농장일.

 

 

탈북

1999년도 생계유지로 탈북 했다가 중국 공안에게 잡혀 1999년 0월 강제 송환되었다. 이후 2000년 6월에 다시 중국으로 탈출.

 

 

한국 입국 날짜

2004년 0월 0일

 

 

인신매매 경험

중국에 있을 당시 다른 집에서 나이 많은 사람 돌봐주는 일을 하다가 북한 사람한테 속아 한족에게 인신매매 당했다.

 

 

강제 송환 경험

1999년 0월 회령 보위부 이틀 동안 조사 받았고, 안전부로 이송

 

구금 시설 경험

1999년 0월 회령 노동 단련대에서 20일, 이후 집결소로 이송되었다.

당시에는 탈북하여 강제 송환 당한 사람들은 집결소에 수감시켰다. 집결소에서의 생활이 가장 힘들었다.

밥도 제대로 안 주고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수감되었을 당시 농사철이라 농장일, 모내기, 김매기 등을 했다.

하루에도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굶어서 죽고, 병에 걸려도 치료를 못 받아서 죽고, 구타 당해서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감 생활동안, 3명이 탈출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잡혔다. 이 일로 집결소 내 강제노동이 더 힘들어지자,

수감자들이 화가 나서 (탈옥했다가)잡힌 한 명을 때려 죽이기도 했다.

 

 

 

[동영상:9]

 

 증언 영상

 

 

 

두번째 순서는 김혜숙(가명)의 증언이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18호 수용소의  조경도를 김혜숙씨(가명)이후에 재구성한 것입니다. 주로 수용소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탄광으로 가게 했으며, 그때의 경험으로 아직도 폐에 탄가루가 있어 생활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수용소 내에서는 지속적으로 총살과 사형을 실시했습니다.

종교를 갖거나, 먹을 것을 훔치면 즉결로 총살했으며, 특히 종교의 경우는 목을 매달아 죽이고 거리에 공개했습니다.

가난이 극심하여 아이를 잡아먹는 경우도 많았으며, 주된 음식은 밥에 소금을 뿌려먹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번째 증언은 마스모토 데루아키(납치 피해자 가족회 사무국장)이었습니다.

 

 

 

사진 왼쪽의 인물이 마스모토 데루아키, 그는 1978년 그의 누나가 북한으로 납북되는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크게 보도되지 않았지만 KAL기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씨의 증언인

'북한으로 납북된 일본인에게 일본어를 배웠다'를 통해 납북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정부는 북한에 의한 납치를 표명하지 않았지만,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했을 때, 김정일은 납치사실을 일부 인정,

평양 정상회담 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납북자의 생사여부를 공개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공개한 내용은 사망자, 생존자 몇 명을 전달했을 뿐, 구체적인 정보는 생략되었습니다.

또한, 사망했다고 하는 8명 중 7명의 유골은 매장 후 산사태로 인해 유실되었으며,

남은 한개의 유골도 그 남편에 의해 사라졌다고 하는 등, 미심쩍은 내용들일 뿐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사망자 발표에 포함된 그의 누나인 슈이치씨는 납북된 후 그곳에서 결혼을 했고,

1979년 해수욕을 즐기다 남편과 함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심장질환도 없던 그녀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남편도 같은 증상으로 사망했다는 점은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게다가 북한에서 사망자의 유골이라고 일본에 전달했지만, 그 유골 역시 사망자의 것이 아닌, 다른 유골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사죄로부터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사망했다고 추정된 8명, 미 입국 2명,

그리고 100명이 넘는 일본인 납치 피해자의 구출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증언이 끝난 후 곧바로 발표 및 토론으로 이어졌습니다.

발표 및 토론에서는 주로

북한의 반인도적인 움직임에 대한 UN의 대처,  국제 법적인 대응 및 국제 사회의 역할에 대한 것들을 논했습니다.  

  

 

 많은 외교관들과 정부 관계자, 국회의원, 남북한 관계자들이 참가했던 포럼, 저 멀리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도 보입니다.  

 

 

 

오늘의 포럼에서는 주로 북한에 대해 '국제적인 대응' '국제법의 적용을 통한 심판'을 촉구했습니다.

북한의 반인도적인 처사는 비단 우리뿐만 아닌 일본도 관련되어있는,

다분히 '국제적인 비인도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이렇듯,

북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고, 혹독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주로 '크로싱'과 같은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던 북한사회는

더욱 잔인하게 구체화 되었습니다.

 

발가벗겨진 시체가 방치되어있는 수용소,

생존할 정도로만 제공되는 식량,

상상 할 수도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

매일같이 행해지는 폭력과 사형

 

그리고

그 안에서의 사람들끼리 발생하는 살인, 폭행...

 

그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고통에서

그러한 삶이 전부인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북한이탈주민들을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와 말투나 행동이 다르다.", "북한에서 넘어왔다."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합니다.

 

 

 그들의 고통과 정신적인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외면하진 않았는지 반성이 되는 시간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하루였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 모두가 같이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