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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1950 흥남, 그 해 겨울>, 그 특별한 이야기

  매서웠던 꽃샘추위가 가고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 요즈음인데요, 이번 겨울 매서웠던 한파를 뚫고 다녀온 <1950 흥남 그해 겨울> 기념특별전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2015년 12월 15일부터 2016년 2월 28일까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무료로 진행했던 이 특별전은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특별전이었습니다. 

 

△1950 흥남, 그 해 겨울△1950 흥남, 그 해 겨울

 

  여러분, 흥남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언뜻 듣기에는 지역이름 같은데 어딘지 잘 모르시겠다고요? 이 낯선 흥남은 바로 북한의 지명입니다. 함경남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흥의 남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 흥남에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흥남 철수 작전'입니다. 특별전의 타이틀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는 이 사건은 1950년 6.25 전쟁 중 겨울에 일어났습니다. 특별전은 이러한 흥남 철수를 주제로 구성되었는데요. 흥남 철수 작전에 관해 살짝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영화 <국제시장>포스터△영화 <국제시장>포스터△<국제시장>의 한 장면△<국제시장>의 한 장면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흥남 철수 작전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남쪽으로 성공적으로 탈출한 작전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어디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의문점이 생기는데요.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특별전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전은 크게 세 분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길 위의 전쟁', '그 겨울의 항해', '우리 안의 흥남'으로 진행되었는데요, 그럼 이 순서에 맞춰 그 겨울의 흥남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흥남 철수 작전 이동경로△흥남 철수 작전 이동경로

 

 

 

1부 '길위의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 이후 수세에 몰린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이에 10월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추수감사절까지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10월 말 중국군의 전격적인 참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함경도 개마고원 부근의 장진호에서 고립된 유엔군은 참혹한 희생을 치르며 후퇴하였는데요. 여기서의 전투가 미국이 기록하길 역사상 가장 고전했다고 불리는 장진호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을 뚫고 흥남에 도착하여 북한 주민들의 피란과 함께 흥남을 떠났습니다. 

 

※ 한눈에 정리하는 흥남 철수 과정 

 

6.25전쟁 발발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 압록강까지 진격한 한국군과 유엔군 - 중국군의 참전 - 뒤바뀐 전세 - 장진호 전투를 치르며 후퇴 -  흥남에 도착하여 피란민과 함께 탈출

 

  1부 길 위의 전쟁에서는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가는 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는데요. 북한군과 중국군이 원산과 그 남쪽 지역을 점령하자 한국군과 유엔군은 흥남 해상을 통해 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장진호에 진출해 있던 유엔군은 남하한 중국군과 맞닥뜨려 11월 27일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이때부터 혹한과 험악한 산악지형을 극복하며 포위망을 뚫으려 사투를 벌였습니다. 유엔군은 하갈우리에서 고토리 지역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계곡’을 돌파하고 12월 11일에야 전투를 마쳤습니다. 이 장진호 전투로 중국군 9병단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중국군의 진출을 지연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쓰이던 군용품△당시 쓰이던 군용품


  전시에서는 혹한과 험한 지형에서 사투를 벌인 당시의 물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군과 미 해병대 마크, 중국군의 물통, 미군용 레이션과 보관상자, 항미원조 표식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 작전 생존자들의 영상 인터뷰를 통해 보다 생생하게 치열한 겨울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토리 광장에는 수많은 전사자들과 전상자들이 열을 지어 누워 있고, 트럭과 헬기들이 연속해서 사상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우리가 점령한 산 정상에는 중국군의 시체가 무수히 흐트러져 있었다. 만져보니 영항 30도의 추위 때문에 꽁꽁 얼어 있었다. 유엔군은 퇴로를 확보하면서 전투를 했다. 황초령을 내려가면서 피란민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들은 머리에 짐을 이고, 등에 지고, 아이 손을 잡고 우리를 따라왔다." -한국군 수호사단 장동욱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를 주제로 발간된 도서들△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를 주제로 발간된 도서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동계전투의 하나로, 유엔군의 주축인 미국과 중국이 격렬하게 맞붙은 혈투였습니다. 이로 인해 양측의 장진호 전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는데요. 유엔군 측은 불리한 전세와 악조건 속에서 이룬 ‘성공적 후퇴’를 높게 평가하며 특히 미 제1해병사단의 활약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습니다. 반면, 중국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미국과 싸워 승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북한은 북한군과 중국군의 협력을 중시하면서 미군의 북진공세를 실패로 돌아가게 한 전투로 묘사합니다. 서로 상반되게 묘사하는 전투의 평가이지만 모두 장진호 전투를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는 악몽 같은 전투라고 말할 만큼 당시 흥남 겨울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2부 '그 겨울의 항해'


  앞서 흥남철수에 관한 배경을 보았는데요. 이제 2부 그 겨울의 항해에서는 이때의 실상과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급변하는 전쟁의 상황 속에 북한의 많은 주민들은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전쟁 중 월남인의 수는 현재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각종 통계들은 대략 65만에서 150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 1950년 12월 이후 동북지방의 해안과 육로를 통해 월남한 이들은 함경도 지역 주민이 대다수이고, 그 수는 십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봅니다. 이때 흥남으로 모여든 피란민들의 모습을 함께 살펴봅시다.


△선박 모형과 피란짐으로 꾸며진 전시장△선박 모형과 피란짐으로 꾸며진 전시장


  흥남철수는 최대 규모의 해상철수작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2월 14일, 군병력이 승선하기 시작, 19일 피란민이 철수하며 12월 24일에야 모든 철수를 마쳤는데요. 수송선은 정원을 모두 10배 이상씩 초과하여 피란민을 실었습니다. 대규모 피란민의 철수는 많은 이들의 결단과 용기, 희생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흥남 철수를 통해 군인 105,000명과 피란민 91,000명을 안전하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사’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가기 위해 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가기 위해 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


  피란민으로 가득한 배는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요. 배의 아래 칸부터 실린 사람들은 군용차량, 기름통 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갑판 위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차가운 바람과 높은 파도를 내내 맞아야 했으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해서 굶거나 멀미로 정신을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용변은 앉은 자리에서 해결했으며 이를 견디다 못해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산모들은 아이를 낳았고  5명의 아이가 배에서 태어났습니다.


“항공유를 가득 실어 사람이 탈 자리는 얼마 없었지. 그곳에 무려 1만 4천 명이 젓가락처럼 꼿꼿이 선 채 사흘간 영하 30도의 혹한과 굶주림을 버텨냈다오. 그런 극한 상황에서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난 것도 기적이 아니겠소.” -생존자 원광석



△한국정부의 표창장△한국정부의 표창장


이때 사용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원래 화물선이였던 이 배는 승선 가능한 인원은 선원 포함 겨우 60여 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라루 선장은 가능한 많은 피란민을 태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14,000명의 피란민을 태운 메러디스 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산항을 거쳐 12월 26일 거제항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항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메러디스 호와 선장, 승무원을 표창했으며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로서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3부 '우리 안의 흥남'


부산으로 모인 피란민들은 막막한 현실 속, 먹고 살기 위해 피란 보따리에서 무엇이든 팔아야 했습니다. 영화의 배경에 되기도 한 국제시장은 가재도구나 생활용품, 구호물자, 원조물자 등 모든 물건이 유통되던 곳이며 고향을 떠나 무작정 피란 온 이들이 일터를 잡은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쓰이던 자전거△당시 쓰이던 자전거


북쪽에서 온 피란민들은 냉면 장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장사는 길거리에서 나무 궤짝을 놓고 만들어 팔거나 면을 머리에 이고 주전자에 육수를 담아 행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피란지에서 냉면재료인 감자나 메밀은 구하기 어려운 재료였고 이때 구호물자를 통해 풍부하게 공급되던 밀가루를 이용해 냉면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부산 대표음식인 밀면의 시초입니다. 밀면은 북쪽에 고향을 둔 피란민과 전쟁 구호물자의 공급이라는 시대성이 결합되어 탄생한 음식이라고 할 수도 있죠.


△군용품으로 만든 생활용품△군용품으로 만든 생활용품


피란민들은 피란민 수용소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기도 하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며 낯선 땅에서 살아갔습니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 이들의 생활용품은 변변한 것이 있을리 없었습니다. 당시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품으로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만들었는데요.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포탄과 군화 깔창으로 만든 망치나 군용깡통으로 만든 통, 드럼통으로 만든 표지판 등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월남한 피란민이 운영하던 상회△월남한 피란민이 운영하던 상회


△김치 파이브 심벌마크△김치 파이브 심벌마크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서 태어난 5명의 아이들은 '김치 파이브'라고 불리며 평화와 은혜, 나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힘든 전쟁 속에서 피어난 생명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위에 보이는 마크는 이런 김치 파이브의 심벌마크이며 이는 당시 해외언론에서도 많이 쓰였습니다.


이렇게 1950년 겨울 흥남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전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전시에서 밀면의 시초가 흥남 철수를 통해 남한으로 온 북한 주민들이라고 한 부분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부산에 여행가면 한 번쯤은 모두 먹는다는 그 음식인데 돌이켜보니 전쟁으로 인한 분단과 피란민들 삶의 노력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보다 분단과 현 상황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전쟁과 역사, 고통과 슬픔, 그리고 삶.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 이야기는 특정한 곳이 아닌 바로 우리 옆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주변을 둘러보고 많은 분들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광복 70년 기념특별전

1950 흥남 그 해 겨울 (Heungnam, the Winter of 1950)


 전시기간 : 2015.12.15 [tue] ~ 2016.02.28 [sun]

 전시장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관 람 료 : 무료

 관람시간 : 09:00 ~ 18:00

 수요일 및 토요일 오후 9시까지 야간개장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매주 월요일 휴관(2015년 1월 1일(설날) 휴관)

- 관람문의 : 02-3703-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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