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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으로 간 독립운동가, 그들의 운명은?



월북한 독립운동가, 그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북에서 숙청되면서 남북 모두에게서 잊혀져간 비운의 혁명가 김원봉, 김두봉.

김원봉은 김두봉의 조카사위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북으로 간 이 두 명을 통해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살펴본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달현, 김두봉, 김원봉, 김일성, 박헌영, 허헌 주석단 일동의 회장입장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대원장 이선근 박사가 6.25 당시 평양에서 수집한 사진.

1978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입수하여, 2009년에 공개했다. 

광복~휴전협정 시기의 미공개된 북한자료사진집이 4권이다.(뉴시스)

 

북한은 1967년 주체사상을 공식적인 이념으로 규정했다. 1970년대 김일성 1인지배체제를 확립시키기까지 반발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세력들은 모두 제거했다. 독립운동의 여부를 떠나 김일성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숙청됐다.

 

출처 : 위키백과 - 박차정(朴次貞/1909년 5월 7일 ∼ 1944년 5월 27일)

김두봉의 5촌 조카딸이자, 김원봉의 본처. 그녀 역시 근우회, 부녀복무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김원봉, 김두봉. 이 둘은 이름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친인척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의 외당숙이었다. 박차정이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충칭에서 숨을 거둔 후에도 김두봉은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사위"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둘의 관계는 김원봉이 재혼하고 나서도 계속됐다. 그들은 해방 이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정치가로 활동했고, 김일성 독재체제 확립과정에서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출처 : 위키백과 -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김원봉 선무공작 영상(1940)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 의열단 김원봉 … 월북 후, ‘국제간첩’으로 전락

의열단하면 약산 김원봉이다. 일제치하 의열단의 테러는 조선 민중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테러대상도 부산경찰서, 조선총독부, 일본 육군대장 등 거물급만 골랐다.

 

하지만 김원봉은 해방 이후 남북 모두에게서 오랫동안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남한을 등지고 북에서는 숙청을 당했기 때문이다.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1980년대 들어와서야 연구가 시작됐다.

 

해방 후 1948년 8월, 김원봉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남한 대표로 선출됐다. 9월 9일 북한정권 수립 후에는 국가검열상(1948.09~1952.05), 노동상(1952.07~1957.09), 조국통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1957.08), 동 상임위원회 부위원장(1957.09~1958.10) 등을 역임했다.

 

이처럼 김원봉은 북한정권의 2차 내각에 국가검열상으로 참여했으나, 1958년 말 북한의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1958년 3월에 노력훈장을 받기도 했으나, 같은 해 그는 북한의 공식 정치무대에서 퇴장했다. 김원봉이 숙청된 1958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30여 명의 남한 출신들이 제거됐다. '적들과 직 · 간접으로 접촉하면서, 제국주의 수정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통일에 대한 대가로 한국의 중립화를 받아들이려 계획한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한 것으로 보인다. 김승곤 전 광복회회장 말에 의하면 “김원봉은 감옥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한 김원봉의 최후는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 구축과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이었다.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간첩', '스파이' 등 변절자로 몰아 정권의 명분을 세우는 일은 21세기 북한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김원봉의 해방 이전까지의 활동

- 1898년 경남 밀양 감천리 출생

- 1919년 11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으로 활동

                     활동내역 : 부산경찰서 폭탄투척(1920), 조선총독부 폭탄투척(1921),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 저격(1922), 중국북벌혁명 참가(1925) 등

- 1932년 장개석 국민정부 지원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 개설

- 1935년 의열단과 그 외 4개 단체 결합하여 남경서 민족혁명당 건립

-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대장으로 활동

- 1942년 민족혁명당 이끌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 겸 한국광복군 부사령 취임

-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장관)으로 광복군 지휘

 

 

출처 : 위키백과 - 전문학교 국어교사 시절의 김두봉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 김두봉 … 월북 후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가 바로 김두봉이다. 김두봉은 한글연구가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뛰어난 활동을 했다. 그러나 북한정권 수립에 큰 역할을 하고, 이후 숙청됨으로써 그 역시 김두봉처럼 남북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해방 후 김두봉은 정세를 관망하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를 지지표명하여 다시 정치활동에 나섰다. 그는 유물론에 입각한 사회변혁을 지지하고 이를 남북 전체로 확대하기를 바랐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잊고 김일성의 권력기반 강화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김두봉은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의원회 의장, 조선임시헌법초안제정위원회 위원장,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노동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2인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김두봉의 정치적 역할은 어디까지나 김일성의 권력유지와 확대를 위한 보조적인 것이었다. 이미 독재체제를 구축한 김일성에게는 더 이상 그는 필요 없어졌다. 또 한편으로는 독재를 위협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결국 김두봉은 남로당에 뒤이은 연안파 숙청과정에서 종파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숙청 후 그는 벽지의 협동농장으로 전출되어 농사일하다가 1960년에 사망했다. (출처 : 경남대 정치학과 심지연 교수 연구)

 

 

김두봉의 해방 이전까지의 활동

- 1889년 3월 17일 경남 동래군 기장읍 출생

- 20세, 기호흥학회가 세운 사립 기호학교에 입학

- 배재대학 재학 중 반일비밀단체 ‘대동청년단’으로 활동하다 적발되어 학업 중단

- 주시경이 운영하던 국어강습소에 들어가 중등과, 고등과 졸업

- 1931년 조선언문회 의사원에 선임

- 최남선의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을 도와 우리말사전 『말모이』편찬에 종사.

- 1914년 주시경 사후 일을 이어받아 강습원 운영

- 1916년 『조선말본』 편찬

- 28세, 보성 · 휘문 · 중앙 등 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 30세, 3·1 운동 참여 이후 일본경찰의 탄압을 피해 아내를 서울에 두고 상해로 탈출

- 1919년, 제5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임

- 1922년 봄, 『조선말본』을 수정하여『깁더조선말본』상해에서 출판

- 1929년 송병조, 조소앙, 김철 등이 참여하고 있던 한국독립당 비서장으로 활동

- 1930년, 한글연구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동아일보 공로자 표창 수상

- 상해 인성학교에서 한글 창제의 유래와 문법을 맡아 박은식과 함께 교사 재직

- 상해 인성학교에서 제4대 교장 취임

- 연안에서 무정과 함께 화북조선독립동맹 결성하고 주석에 취임

-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 취임 

 

 

조선의용대 약산 김원봉의 선무공작영상(1940) - 약산 김원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출처

한상도, 『대륙에 남긴 꿈(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 역사공간, 2006.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한길사, 1998.

염인호, 「인물바로보기2-의열단에서 조선민족혁명당까지 김원봉」, 『내일을여는역사』, 제1호, 2000.

조성희, 「잊혀진 혁명가 김두봉」,『중등우리교육』, 통권 44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