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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기사도 맛깔나는 상생기자단 간판 꽃미남 남두희 기자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고구려를 모르는 분은 없으시죠? 기원전 1세기에 수립되어(BC 37 ~ AD 688) 약 700년 동안 현재의 중국 북동부와 한반도 북부 지방의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역사 중 역동적인 면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시대이자 국가였습니다. 광개토대왕 때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요동 지방까지 영유했을 정도로 대국이었으며,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평양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로 약 275년간 있었기에 한반도 북부지역에는 고구려 유물․유적이 많습니다. 이번 시간은 2004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북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분묘유적인 고구려 고분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 고분군이란?

 

  고구려 고분은 고구려 건국 초기의 중심지인 압록강 유역과 후기의 중심지인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특히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지안 일대에는 수만 기의 고구려 고분이 곳곳에 널려 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중국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고분들이라 중국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관심을 갖고 고분을 관리․보존하고 있지 않아 훼손의 정도가 심하다고 합니다.

 

  고구려 고분은 분묘의 형태상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흙을 덮은 봉토무덤입니다. 이 두 가지 양식 중 돌무지무덤이 먼저 나타난 형태로서 대략 기원전 3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후자는 기원후 4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에서 가장 큰 특징은 벽화를 그린 무덤이 아주 많다는 점입니다.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도 1300년을 넘긴 생생한 무덤 내부 벽화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건축 기술 및 잘 복원된 고구려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16기의 벽화 고분을 포함해 북한의 5개 지역 고분군 총 63기가 이에 해당합니다. 평양시 역포구역의 동명왕릉과 진파리 1호분 등 15기, 평양시 삼석구역의 호남리 사신무덤 등 34기, 평안남도 대동군의 덕화리 고분 3기,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의 강서세무덤 3기, 25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행렬도가 그려진 안악3호분, 독립고분 8기 등입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남쪽의 백제·신라·가야에도 영향을 미쳐서 공주의 송산리 6호분이나 부여의 능산리 1호분, 고령 고아동 벽화 고분 등에서도 연화문(연꽃을 본뜬 무늬)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고구려 사회의 사상적 변화상이 잘 표현되어 있어, 고구려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구려 고분군 가운데 Best of Best라 할 수 있는 강서 삼묘리 대묘ㆍ중묘, 안악 3호분, 덕흥리 벽화무덤, 이 세 가지 고분들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1. 강서 삼묘리 대묘ㆍ중묘

 

  평안남도 강서군 삼묘리의 평야부 중앙에 있는 고구려시대 고분인 강서 삼묘리 고분군은 3개의 묘가 삼각형을 이루면서 배치되어 있습니다. 3기의 고분 가운데 규모가 큰 것부터 대묘ㆍ중묘ㆍ소묘라 명명하였는데, 크고 벽화가 많은 것이 대묘, 작지만 벽화가 있는 것이 중묘, 벽화가 없는 것이 소묘입니다. 이 중 대묘는 북한 국보급 제3호로써 봉토 지름 58m, 높이 10m, 남쪽으로 굴 모양의 널길이 있고 시신을 안치한 널방은 동서 3.4m, 남북 3.45m 높이 3.8m의 단실묘입니다. 

 

  천장은 화강석을 다듬어서 만든 모줄임천장이며, 천장 꼭대기는 하나의 돌로 덮었습니다. 널방 입구 좌우편 남쪽 벽에는 봉황이 한 쌍 그려져 있고, 동쪽 벽에는 용이, 서쪽 벽에는 호랑이가 북쪽 벽에는 거북과 뱀 모양의 현무가 그려져 있으며, 천장에는 인동초ㆍ연꽃ㆍ산ㆍ용ㆍ봉황ㆍ기린ㆍ선녀 등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들 그림은 철필로 그린 것 같이 힘차고 날카로우며 섬세하고 화려합니다. 이는 중국 육조 말기의 그림과 서로 통하는 고구려 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 대묘의 사신그림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방위신 역할을 하는 수호신입니다.

 

<강서 삼묘리 대묘에 있는 현무도, 출처 : bonjour9.com/sub/st/st-orient-mural.html>

 

 

  중묘는 북한 국보급 제4호입니다. 규모나 구조는 대묘와 비슷하나, 널방의 천장구조는 삼각형 석재를 쓰지 않고 벽면에 평행하게 쌓아서 네모나게 마무리했으며 널길에는 벽화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널방 4면의 벽에 사신(四神)그림을 그렸으나 대묘처럼 남쪽 벽의 봉황 밑에 산줄기는 없다고 하네요. 천장 중앙에는 연화가 그려져 있고, 그 주위에 해 ·달 ·봉황 ·인동 ·인동당초가 그려져 있습니다.

 

<강서 삼묘리 중묘에 있는 주작도, 출처 : blog.eduhope.net/song/%3Fpid%3D152> 

 

 

2. 안악 3호분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무덤인 안악 3호분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 67호입니다. 357년에 축조했으며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무덤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분은 사각형으로 그 크기는 동서 30m, 남북 33m, 높이가 6m입니다. 무덤 자체도 크지만 산 위에 있어서 더 웅장해 보인다고 합니다. 무덤은 언덕을 파고 반 지하에 돌로 쌓았는데 널방(현실)은 현무암과 석회암 판석으로 짜여 있습니다. 내부는 문칸, 앞칸(전실), 동서의 두 곁칸, 안칸(현실), 회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악 3호분의 전실 내부모습, 출처 : chang256.new21.net/board/board.p...no%3D913>

  

 벽화는 돌벽 위에 직접 그렸습니다. 앞칸에는 무악의장대를 그리고 서쪽 곁칸에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주인공이 문무관을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장면과 시녀들을 거느리고 있는 안주인을 그렸습니다. 동쪽 곁칸에는 부엌, 우물, 방앗간, 외양간, 마구간, 차고 등을 그렸습니다. 회랑에는 왕의 ‘백라관’을 쓰고 수레를 탄 주인공이 문무백관, 악대, 무사 등 25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는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벽화들은 당시의 우수한 벽화기법을 보여줍니다. 이 무덤은 우리나라의 돌 다루는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화면의 크기도 엄청나고 등장인물도 많으며 내용도 다채로워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미술사에서도 수작이라 평가 받습니다. 안악 3호분은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고, 화려한 벽화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의 사회와 문화 등 다방면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라 하겠습니다.

 

<안악 3호분의 주인이라 추측되는 고국원왕, 출처 : nuri.hani.co.kr/hanisite/dev/boa...o%3D4814>

 

 

3. 덕흥리 벽화무덤

 

  남포특급시 강서구역 덕흥동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고분인 덕흥리 벽화무덤은 북한의 국보문화유물 제1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무학산 서쪽 옥녀봉의 남단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408년(광개토대왕 17)에 축조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대신급 인물이었던 '진(鎭)'의 무덤입니다.

 

  무덤은 묘도(무덤길), 전실(앞방), 현실(안방) 연도(무덤안길)로 이루어진 2칸 무덤입니다. 벽과 천장에는 여러가지 내용의 인물풍속도와 그것을 설명하는 600여 자의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무덤안길의 좌우 벽에는 괴물 형상의 문지기와 인물들이 그려져 있고 이 무덤의 문을 409년 2월 2일에 닫았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습니다. 앞칸의 벽과 천장에는 무덤의 주인에 대한 내용들과 신앙세계를 반영한 그림들과 그에 대한 설명이있습니다. 설명에 따르면 '진'은 고구려 고유의 작위인 대형을 지냈고 여러 장군직과 태수직을 거쳐 유주자사를 지냈으며 77세에 죽어 이곳에 묻혔다고 합니다.

 

   안칸에는 진의 생활 모습을 그렸는데, 특히 서쪽 벽의 활쏘기 그림은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생생하고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안칸 북벽에는 큰 집에 앉은 남자와 시종들이 그려져 있고 또 다른 벽들에는 각종 말과 여물을 써는 아이들, 수레와 건물들, 연꽃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밖에 부부의 나들이 장면, 고구려 전통의상을 입은 두 여인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천장에는 해·달·별 등 천체의 모습과 고구려인의 신앙심, 고대설화를 반영한 상상화들을 그려놓았습니다. 그 중 견우와 직녀의 이별 장면은 이미 이 시대에 견우와 직녀의 설화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 외에 무병장수의 소망과 의좋게 살려는 소망 등을 상징한 그림 등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덕흥리 벽화무덤은 주인공과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큽니다.

 

 

                                                  

                            <덕흥리 벽화무덤, 출처 : kr.blog.yahoo.com/han1592/984604>

 

  2003년도에 북한은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바 있었는데 그때에는 ICOMOS(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 평가보고서에서 등재가 보류되는 바람에 결국 최종 등재되지 못했습니다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2004년 7월 1일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과 중국에서 신청한 ‘고구려 수도, 귀족과 왕족의 무덤’은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됩니다. 만약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추진한 중국 영토 내 고구려 유물ㆍ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 움직임이 북한을 제외하고 유네스코에서 받아들여졌더라면 고구려 역사에 대한 국제적인 입지가 매우 좁아질 뻔했습니다. 

 

  고구려 고분군 유네스코 등재에 관련한 남과 북의 협조와 연대는 앞으로의 남북관계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줍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재청은 북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힘을 보탰습니다. 우리나라 대표단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중국에서 북한 측 대표단과 자리를 함께 하며 각국 대표자들을 상대로 북한 문화유산 등재 지지를 요청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ICOMOS-KOREA(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는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에 대한 수준 높은 자료를 각국 대표에게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남과 북이 정치적 입장, 이념의 차이를 배제하고 문화재 보존이란 공동의 목표아래 공동의 노력을 경주해 온 지난날의 일은 현재의 남북관계 경색에 작지만 분명한 해법을 알려줍니다.

 

  지난 2006년 4월 19일부터 5월 2일 사이에 고구려 고분군의 과학적 연구와 보존 조치를 위해 남북한 전문가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실태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조사를 통해 고구려 고분군의 보존상태가 심각하진 않지만 대체로 우려스럽다는 결론이 나왔었습니다. 남북이 고구려 고분군에 대해 공동으로 조사한지 어느덧 4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문화재는 남북한의 체제나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는 역사의 산물인 만큼 직접적이고 실효성 있는 지원의 규모와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자료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두산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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