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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최초의 더비, 경평축구대항전

강평축구


얼마 전, 전 세계인의 축제인 2014 브라질 월드컵이 폐막했습니다. 월드컵 기간 동안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이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며, 전 국민이 울고 웃으며 무더운 여름밤을 보냈습니다. 지난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남·북이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동반 진출의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했는데요, 이번 대회에서는 북한이 지역 예선에서 통과하지 못하며 본선 진출에 탈락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남·북한은 아시아 국가 중 월드컵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1, 2위 팀으로 랭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위에 올랐으며,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하며 이변을 일으켰었지요. 아시아 축구 맹주 우리나라와 다크호스 북한! 월드컵 무대가 아니더라도 남과 북이 함께 축구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요, 그렇다면 남·북이 함께한 축구경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일제강점기 시대로 거슬러올라가, 남북의 축구대항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경평축구대항전! 저 한솔 기자와 함께 남·북이 함께했던 경평축구대항전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경평축구대항전이란?

 경평축구대항전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양대 도시인 경성(現 서울)과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단이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치렀던 친선축구경기입니다. 경평축구대항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1929년 경성에서 조선일보가 주최한 대회를 최초의 경평축구대항전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며, 1933년 평양에서 열린 대회를 1회 대회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남·북의 양대 도시인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겨룬 친선축구경기 대회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대회 명칭과 주최측은 조금씩 다릅니다. 이 기사에서는 그 당시 언론에서 표현한 것을 바탕으로 ,1929년 대회를 첫 경평축구대항전으로 보는 입장에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929년에 열린 경평축구대항전이 최초

 최초의 경평축구대항전은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 10월 8일 경성 휘문고등학교에서 열렸습니다. 경기에 앞서 개회사를 맡은 당시 조선일보 안재홍 부사장은 '경기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과시하는 기회'로 승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경성축구대항전은 단순한 도시 간 대항전이 아닌, 일제강점기 민족의 단합과 반일감정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취지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팀'이라는 용어 대신 '군(軍)'이라는 용어를 사용해다고 하는데요, 따라서 '경성군 대 평양군 축구대항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선수들은 어떻게 선발했을까요? 1929년은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이 창단하기 전인데요, 따라서 학교 대표나 사회인 축구선수 중에서 선수를 선발했다고 합니다. 경성군은 당시 민족 사학인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20~23세 학생들을 주축으로, 평양군은 숭실전문학교의 25세 이상 학생들을 중심으로 선수단을 꾸렸답니다.


경평축구▲ 경평축구대항전 선수들 모습(출처:대한축구협회)

 

7천여 명의 관중들로 가득 찬 경성 휘문고등학교에서 열린 제1회 대회는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3차례 경기가 열렸습니다. 3차전 동안 경성군은 김원겸 선수가, 평양군은 강기순 선수가 하프진을 지켰으며, 경성군 최성손 선수와 평양군 김재재 선수가 날쌘 윙으로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습니다. 처음으로 맞붙어 탐색전을 펼쳤던 1차전은 1대1로 무승부! 하지만 2차전과 3차전 모두 평양군이 4대3, 4대2로 승리하면서 평양군이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당시 평양군은 일본의 최강팀으로 꼽히는 와세다 대학을 7대0으로 대파하며 명성을 날리던 숭실전문학교 선수들이 대거 포함되었기 때문에 강세를 보인 것 같습니다. 원정대회에서 우승한 평양군은 엄청난 환영 속에 평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제2회 경평축구대항전, 경성군 우승을 되찾아 오다

 제2회 경평축구대항전은 이듬해인 1930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경성운동장(前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경성군은 전 대회의 패배를 되갚아주기 위해 이름이 쟁쟁한 선수들을 영입하여 출전하였습니다. 이영민 선수를 중앙공격수(CF)로 기용하고, 김화집, 채김석 선수를 양쪽의 윙으로 배치하여 독수리 날개 같은 작전을 펼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양군 김원겸 선수를 집중 수비하기 위해 김용식 선수를 보강하여 안정된 수비진을 구축했습니다. 선수 영입의 힘일까요? 경성군은 1차전에서 3대2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2차전에서는 다섯 골을 내주고 세 골을 넣으며 2점 차 패배를 했습니다. 경성군과 평양군은 그야말로 난형난제, 용호상박! 그러나 지난 대회 때 홈에서 우승을 내준 경성군이 2만여 명 홈팬들의 열띤 응원에 힘입어 5대1로 평양군을 대파하고 우승을 가져갔습니다. 제가 뽑은 제2회 경평축구대항전 MVP는 바로 이영민 선수인데요, 바로 야구팬들에게는 '이영민 타격상'으로 많이 알려진 선수입니다. 이영민 선수는 육상과 야구는 물론 스피드 스케이팅 분야까지 석권한 만능 스포츠맨으로, 그 당시 육상 400m에서 54초6으로 한국선수권 기록을 가진 준족의 소유자였으며, 일본 야구 대표선수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2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경평전은 중단되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여러 추측만이 분분한 가운데, 친선 목적의 경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어 과도한 승부욕으로 싸움이 잦아져서 중단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1933년에 재개된 경평축구대항전

 그후 1933년 조선축구협회의 주선으로 경성과 평양의 대표자들의 모임을 가졌는데요, 양 측은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의 창단을 기념하여 봄·가을에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따라서 1930년 2차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던 경평축구대항전이 1933년 4월 6일부터 10일까지 '평양 주최 친선경기'라는 이름으로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경평축구대항전은 지난 대회와는 달리 이틀에 한 번씩 경기를 치렀습니다. 또한  3명이었던 심판진을 5명으로 확대하여 진행하였습니다. 대회 전적 1승 1패로 호각세를 보인 경성군과 평양군은 각자 전열을 가다듬고 경기에 출전하였습니다. 제2회 대회에서 우승을 놓친 평양팀은 선수를 보강하여 나왔는데요, 그 중 김영근 선수는 불세출의 명플레이어로 뽑혔답니다. 경성팀도 배종호 선수 등을 영입하여 만만치 않았는데요, 그래서일까요? 1차전은 3대2 경성군 승, 2차전은 무승부, 3차전은 3대0 평양군 승으로 종합 1승1무1패를 기록하였습니다.

 

 네 번째 대회는 조선체육회와 조선체육계사가 공동 주최한 경평축구대항전으로, 조선중앙일보의 후원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신문에 실으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신문으로 유명하지요. 1933년 9월 20일부터 3일간 경성 배재중학교에서 열린 이번 대회는 다시 주심 한 명과 선심 두 명으로 구성된 삼심제로 진행되었습니다. 1차전은 3대2로 경성팀이, 2차전은 3대2로 평양팀이 이기며 1승1패씩 나눠가졌습니다. 대망의 3차전! 3차전은 1대1 무승부로, 지난 대회에 이어서 양팀은 1승1무1패를 기록하며 비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대회 우승도 한차례씩 나눠가졌습니다.

 그러나 치열한 공방전 외에도 선수들 간 치열한 발길질과 몸싸움이 있었습니다. 경성으로 원정 온 평양군 선수들 중 서너명은 붕대로 머리를 싸맸고, 그 중 심한 경우엔 다리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나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경성군이 평양으로 원정갈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처음의 친선경기 목적과는 달리 승부에 중점을 두게되다 보니 친구였던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서면 경쟁자가 되었고, 그러던 중 1935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경평축구대항전은 끝이 났습니다.


경평축구▲ 경평축구대항전 경기모습(출처: 동아일보 1935.04.14. 3면)

 

결국 한국 축구 사상 최초의 장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 무렵, 노장선수들로 구성된 평양군은 다채로운 플레이어를 배출시키지 못했고, 경성군은 지방에서 밀물처럼 몰려든 신인 선수들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경성과 평양, 조선의 양대 도시에 집중된 선수들이 양적으로 과잉되었는데, 이후 점차 지방의 중소 도시로 분산되었다고 합니다. 1936년에는 당시 기교파의 일인자인 이유형 선수를 중심으로 함흥에 축구팀이 창설되었는데요, 경평축구대항전은 1938년 경성, 평양, 함흥의 3도시 대항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로 인해 모든 구기종목 대회는 중단되었습니다.

 

  1946년, 해방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경평축구 대항전 

 해방 후, 1946년 3월 25일부터 양일 간 자유신문사 주최로 경성운동장에서 마지막 경평축구대항전이 열렸습니다. 해방 후 첫 경평축구대항전인 이 대회는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 이후 4년 만에 개최되는 대회이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열정적인 응원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1차전은 2대1로 경성군이, 2차전은 3대1로 평양군이 이기며 또 한차례 대회 전적 무승부를 나눠가졌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열정이 넘치고 넘친 탓에, 2차전에서 관중이 난동을 벌여서 경찰이 공포탄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한편 평양 선수들은 38선으로 남북 간 통행이 금지되면서, 어렵게 경비망을 뚫고 내려와 경기를 치렀었는데요. 따라서 경기 후 평양으로 돌아갈 때, 육로는 위험하여 뱃길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평양 선수들은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평양으로 꼭 초청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요,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경평축구대항전은 무기한 중단된 상태입니다.  

 

  경평축구대항전의 의미

 이처럼 경평축구대항전을 통해 조선을 대표하는 양대 도시인 경성과 평양에 당시 최고의 축구군이 결성되어 있었으며, 도시 간 축구 리그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K-리그의 모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경성축구대항전은 단순한 도시 간 대항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민족의 단합과 반일감정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취지로 열렸다는 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한편 경평축구대항전의 주축이었던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은 해방 이후 각각 남·북 축구 국가대표팀을 결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경평축구대항전으로 축구 기량을 닦아온 덕분에, 우리나라와 북한이 각각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과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 진출의 쾌거를 이룰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경평축구대항전이 다시 재개되는 날을 고대하며

 1946년 마지막 경평축구대항전 이후로 남·북은 몇 차례 축구 경기장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월드컵, 올림픽 등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남·북의 도시를 대표하는 팀들이 아닌 국가대표팀이 경기를 치른 적이 있으며, 1990년 10월 11일 평양에서, 동년 23일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남·북이 축구 경기장에서 만난 것은 2002년 9월 5일과 8일, 2005년 8월 14일로,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 국가대표팀이 '남북통일축구경기'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남북 간에 정기적인 축구 경기는 1946년 경평축구대항전을 마지막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남·북 간의 친선경기가 쉽사리 성사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경평축구▲ 2005.08.14. 남북통일축구경기 (출처: 연합뉴스)

 

 올 9월에 개최되는 인천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참가 의사를 밝혀오면서,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이번 인천아시안게임은 비정치적인 스포츠 문화 교류로서, 남북 스포츠 문화 교류 역사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1929년부터 약 85년의 긴 역사를 가진, 남·북이 함께했던 경평축구대항전을 떠올리며, 어서 빨리 남·북이 정기적인 친선축구경기를 치르며 자주 교류하고 왕래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서울에서도, 평양에서도 경평축구대항전을 관전하며 응원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이상 6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한솔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