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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북한에서 온 외숙모

안녕하세요, 이번 기사로 통일부 대학생기자단을 마무리하는 한 기자입니다. 그동안 저는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는 나름의 원칙으로 기사를 시작할 때 인사말을 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본 기사의 내용 때문이나,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감상에 젖어 인사를 드렸습니다. 마지막 기사라는 지면을 빌려, 그동안의 취재처 분들과 인터뷰를 해주셨던 분들께 감사와 사과를 전합니다. 제 부족함과 게으름으로 많은 기사를 때에 맞추어 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사는 제 가족 이야기입니다. 제 막내 외숙모는 북한에서 왔습니다. 탈북민이라는 이름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한국인이고, 가족이고, 이웃이었습니다. 인터뷰는 민감한 부분과 비보도를 요청한 부분이 많아서 보기에 매끄럽지 못할 수도 있고, 사진도 없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외숙모께 감사드립니다.

 


Q. 남한에 와서 살아가면서 불편한 점이나, 남북을 비교했을 때 느꼈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 사회주의의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걸 자신의 의사로 할 수는 있지만, 때로는 자본주의가 사람을 힘들게 하는 때가 있어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노력이 필요하기는 한데, 모두가 노력을 하니까 다른 사람을 항상 뛰어넘어야 하는 긴장이 있어요. 경쟁이 지나쳐요.


Q. 처음 남한으로 건너오셨을 때는 남한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출발선부터 달랐잖아요.

A. 그렇죠. 그런 점에서는 좀 더 빨리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너무 늦은 나이에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도 젊었을 때 고생했던 게 바탕이 되어서,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었어요. 물론 사회로 나와 보니까 부딪히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노력만으로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것도 많았어요.


Q. 그러면 정부 차원에서 어떠한 도움이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다른 탈북민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본다면요?

A. 취업 개선이요. 고용센터나 취업 알선 사이트에서 취업 정보는 많아요. 그렇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보다는, 공부를 해서 원하는 직업을 갖고 싶을 때는 도움이 필요해요. 알려주는 사람이나 인맥으로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죠.


Q. 괜찮으시다면 북한을 나오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A. 북한에 있을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어요. 그때만 해도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제가 21살 때 쌍둥이 동생이 치료를 못해서 세상을 떠났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보다 마음이 어렵고 집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서 중국으로 넘어갔죠.


Q. 탈북 과정이 위험하지는 않았나요?

A. 제가 넘어올 1998년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탈북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때는 북한에서 배급 체계가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1992년까지만 해도 배급제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배급이 끊기고, 사람들이 시장의 개념도 없어서 장사할 생각도 못하니까 많이들 갈팡질팡했어요.


Q.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때의 여파인가요?

A. 어려움이 1992년부터 시작됐는데, 1994년부터는 심해진 거죠. 그래도 1992년에만 해도 조금씩 밀려서라도 주기는 했는데, 1994년부터는 아예 끊기니까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예요. 배급 체제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식량이 끊기니까, 장사 개념도 없고 돈 버는 개념도 없어서 못 먹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는 도강(渡江)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북한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전에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라는 구호가 있었어요. 모두가 평등하게 안정적으로 살았고, 비교할 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어려움이라는 걸 못 느꼈어요. 우리 때는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가 성인이 됐을 때 어려움이 찾아왔죠. 저보다 아래 세대들이 힘들어요. 어릴 때 잘 먹지를 못하니까요.


Q. 남한에 와서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기관, 단체, 또는 사람이 있다면요?

A. 딱히 없어요.


Q. 정부에서도 특별히 해준 게 없고요?

A. 중국에 있을 때 운 좋게 지금의 양부모님을 만나서 남들보다는 조금 더 마음에 안정을 가지고 살았어요. 저는 옷 만드는 걸 굉장히 좋아해서 중국에서부터 이 방면으로 일을 해왔어요. 한국에 오면 디자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고,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을 마치자마자 학원에서 공부하고, 이듬해 3월에 학교에 들어가서 또 공부를 했어요. 갖고 있는 계획을 단계별로 차분히 진행하다보니 정부의 도움을 크게 받지는 않았어요.


Q. 남한에서는 북한식 디자인하고 합쳐서 새로운 걸 만들고 있는 건가요?

A. 아, 북한에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전에 TV에서 보니까 북한에도 피팅 모델이 있다고 하던데, 제가 북한에 있을 때만 해도 그런 게 없었거든요. 제가 북한을 나올 때는 시장이 들어선 지 2~3년 정도라 활성화되지 않아서 그랬을 거예요.


Q. 남한의 디자인 업계에서 일을 해보니까 어떠세요?

A. 디자인 업계가 어렵고 화려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열악했어요. 그리고 창조하는 디자인보다 카피하는 디자인이 더 많았어요. 카피를 하려고 외국에서 샘플을 얻어서 수정을 해요. 꽃 하나만 바꾼다거나, 무늬의 위치나 색을 바꾸는 식이고, 전체적인 디자인을 창조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실망했고, 다시 공부를 할까 생각 중이예요.


Q. 업계의 비밀을 알게 되었네요.

A. 디자인 쪽이 이런 줄 몰랐죠? 내수 시장은 대개 그래요. 그리고 수입이 많이 들어와서 안 그래도 어려운 내수 브랜드가 거의 다 죽어요. 게다가 제가 좀 더 젊었으면 시작의 어려움이 덜하겠는데, 실장급이 되어야 할 나이에 신입으로 들어가기가 너무 어려워요. 여건이나 인맥도 받쳐주지 않아서 하고 싶어서 한다는 일념뿐이라 어렵죠.


Q. 북한은 어때요?

A. 북한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학교를 2년 다녔어요. 그리고 탈북을 했죠. 북한에서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잘 몰라요.


Q. 그렇다면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A. 제 학창시절 당시는 여기나 북한이나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방과 후 수업도 잘 되어 있었고요. 수업을 마치면 각자 그룹에 들어가요. 수학, 음악, 체육 등이 있죠. 대신 남한은 사교육이 많아요.


Q. 남한에 와서 다른 탈북하신 분을 만난 적이 있나요?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해요?

A. 아무래도 같은 고향에서 왔으니까 통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직장에서 못했던 말들, 우리끼리 편하게 할 수 있는 대화를 하는 거죠. 우스갯소리도 하고요.


Q. 정기적인 모임이 있는 건가요?

A. 정기적인 모임은 없어요. 송년회 같은 경우에 가요. 웬만하면 잘 안 가려고 하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앞으로 나갈 길이 잘 안 보이니까, 모여도 일상적인 이야기 외에는 잘 안 하는 거죠.



이후 저에 대한 질문들을 하셔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다시 한 번 인터뷰에 응해주신 외숙모와, 옆에서 도와주신 외삼촌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