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짤막하게나마 소설 한 편을 읽어보세요.
여러분! 위 소설의 제목을 아시나요? 옛것을 지키려는 아버지와 새것을 권유하는 아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돌다리」입니다. 이 작품은 읽기 쉽고 더군다나 수능에도 출제되어 청소년들에게 익숙한 문학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쓴 작가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지금부터 여러분께 작가 이태준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 상허 이태준
불우한 어린시절
호는 상허(尙虛). “소설만으로 전업을 못 삼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한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구한말 나라를 개혁하려고 개화당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개혁에 실패하자 가족을 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게 됩니다. 몇 해 뒤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 온 이태준은 고학을 하며 어렵게 휘문고보 등을 거쳐 일본 도쿄로 건너가 조치대 문과에 입학하지만 곧 자퇴하고 맙니다.
작품활동
「오몽녀」가 입선되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후「까마귀」와 같은 단편소설들을 내놓으며 탁월한 미문가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상허의 산문, 지용(芝溶)의 운문’(지용은 정지용을 의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의 문체는 당대의 최고였습니다. 이태준은 일제강점기에 대표적인 문예지《문장》을 창간하고, 1933년 이효석,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구인회의 모더니즘 분위기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변해 가는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하층민들의 삶과 그 속에서 우러나는 소박한 인간애, 고향과 옛것에 대한 향수, 존재의 소멸에 대한 허무 의식 등을 주제로 한 소설을 내놓습니다. 그는 “저널리즘과의 타협이 없이, 비교적 순수하게 나대로 쓰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대로 장편보다 단편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강압정책이 극에 달하자 이에 굴복한 많은 문인이 일제가 수행하던 침략 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태준도 예외가 아니어서 1940년《문장》에 친일 색채가 짙은「토끼 이야기」와「지원병 훈련소의 1일」등 일본어로 된 많은 글을 내놓습니다. 그러나「토끼 이야기」에 나오는 “그 작은 그 귀여운, 그리고 박꽃처럼 희고 여린 동물에게다 오륙 명의 거센 인생의 생계를 계획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죄스럽고 수치스럽기도 하였다.”라는 지문은 비록 친일 행각을 벌일망정 작가의 마음 한 구석에 죄스러움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 서울로 올라온 이태준은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참여하고 1946년 2월에 열린 전국 문학자대회에 앞장설 뿐 아니라, 좌익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나서게 됩니다. 아울러 이 단체의 기관지인《문학》에 일종의 고백서 또는 전말서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좌파 이념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 등 8·15 전후의 일들을 풀어낸「해방 전후」를 발표합니다. 하지만 그는 일제 강점기에 보인 소극적 처세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일원이 되어 1948년 홍명희와 함께 월북합니다.
월북 그리고 북한의 문인숙청
월북 후 이태준은 한동안 북한 문단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일성대 교수인 정률은 그를 들어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렀고, 『로동신문』주필 기석복은 그를 위해 조·소문화협회 주최 이태준 연구발표회를 수차례 주선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의 문학은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휴전과 함께 사회적 혼란이 어느 정도 평정되자, 북한에서는 문학 예술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습니다. 김일성은 먼저 남로당 박헌영 일파를 숙청하고 월북문인들 가운데 남로계 문인으로 지목된 임화, 김남천, 이태준, 설정식 등 상당수의 문인들을 문단에서 제거합니다. 전쟁 직후 복구 작업에 들어서기 전에 이루어진 문인숙청은 문학 예술가들의 당적 통일성을 파괴하려는 일체의 종파주의적 행위를 거부하고, 대중의 혁명투쟁 의식과 전투의식을 마비시키는 부르주아 문학사상을 분쇄해야 한다는 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태준과 그의 문학작품들은 종전 이후 남로당계의 몰락과 함께 북한 문단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순박함을 지닌 이태준
▲ 이태준 가족사진
골동품과 고서화 등 옛것에 대한 취미는 1930년대 말기에 활동한 여러 문인에게서 발견되는 것으로, 당시의 어두운 현실을 부정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태준의 소설에서는 작가 특유의 세련된 문체, 치밀한 구성과 밀착되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이 밖에도 선명한 성격 창조, 형식의 완결성 등은 이태준을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작가로 떠오르게 합니다.
이태준은 자신의 소설에 순박하고 선량하며 어리석은 인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제 한 몸 추스르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 옛날이나 회상하며 여생을 보내는 노인 등 흔히 인생의 낙오자들을 등장시킵니다. (위에서 소개한 「돌다리」에서도 이런 인물상이 보이죠?) 그는 이들을 연민의 정서로 바라보는데, 이런 작가의 시각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태준의 문학 채취를 느끼고 싶다면 수연산방에 가보세요~
▲ 수연산방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머물면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등의 작품을 집필한 곳입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대표적인 명소로 1977년 서울시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는 이태준 선생의 외종손녀가 당호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채 곳곳에는 그가 쓴 책과 소품 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2013년 MBC ‘무한도전’, 영화 ‘하녀’(2010),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비몽’(2008)에서도 나왔다고 하니 연인, 친구, 가족과 함께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월북 작가이기 때문에 이태준의 저작들은 오랫동안 남한에서 금서가 되었고, 중고등학교에서도 그에 관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며 ‘한국 단편의 완성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등의 칭송을 들어 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한 때는 희대의 작가라며 떠받들다가 ‘월북’이라는 이유로 그의 문학사적 노고와 작품성을 묵살해버린 그 시절의 이중성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보여주고, 독자는 그 작품을 통해 작가의 인생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인생까지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상을 뛰어 넘어 작가와 작품을 볼 수 있는 눈을 높였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상허 이태준 사진 - 네이버 지식백과
이태준 가족사진 -
조선일보 http://media.daum.net/culture/leisure/newsview?newsid=20110307093008409&srchid=IIM%2Fnews%2F39455762%2F6d3b11f8412c9f42a377941b6c723406
수연산방 사진 - 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21/2011022101272.html
수연산방 자료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참고 자료 출처 -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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