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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백범 김구의 통일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남과 북에 단독정부가 세워지다

북측과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한 뒤 나는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네. 그러나 불과 5일 뒤, 남쪽에서는 제헌국회를 결성하기 위한 '5.10 총선거'가 열렸다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나는 이 선거에 불참을 통보하였으나, 이미 정세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 1948년 8월 15일 남쪽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네.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나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것이지, 결코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한 것은 아니란 것일세. 나는 오로지 대한민국이 통일정부로 시작되기를 바랐을 뿐일세. 하여 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제연합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 선출된 유일 합법정부'라고 승인하자,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절대다수 국가의 찬성으로써 한국을 승인하였다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 과정 중에 있어서 영원히 기억할만한 거대한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발표했다네.

남쪽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뒤이어 24일 만인 9월 9일 북측에서도 김일성을 주석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지. 대한민국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나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정부를 세운 것을 보고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네. 남쪽에서 정부가 수립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자신들의 정부를 세운 것은 이미 정부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니 말일세. 그들은 심지어 종래 사용하던 우리의 국기 태극기마저 버리고 국기까지 바꾸었다네. 나는 성명 발표를 통해 북측에 '남북협상을 통해 맺은 공동성명'을 준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네.

인민회의라는 것을 통하여 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기까지 바꾸었다. 물론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일반인 것이다. 이로부터 남북은 상호 경쟁적으로 국토를 분열하여 동족상잔의 길로 나갈 것이다.··· 북한에 대하여 희망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여유가 있다면, 금차의 과오를 시정하고 남북협상의 결과로 발표된 4월 30일부 공동성명에 제정된 대로 실행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홍명희 선생이 신속히 서울로 돌아와 최근에 바뀐 북한정세를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 1948.7.19「제2차 남북협상에 양 김 선생 공동성명」

 

(영상: 북한, 국기를 태극기에서 인공기로 교체하다 - 출처: 국가기록원)


평화통일의 길

이제 남과 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단독정부 수립을 비판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 하지만 나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네. 오직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남과 북의 정부가 전쟁으로 통일을 이룩할 것이 아니라 평화협상을 통해 '통일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였다네.

이 무렵 나의 남북협상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이에 대하여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지. 나 역시 남북협상 한 번으로 통일정부 수립이 단번에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네. 이 협상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단계의 첫 걸음이라 여겼네.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 한 번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 상대방과의 지속적인 대화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 믿었네. 1차 협상 이후로도 2차, 3차 협상이 이어지다보면 언젠가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나는 굳게 믿었네.

제1차 협상을 실패라고 규정짓는 것은 조급한 생각이다. 국제적 압력으로 첨예하게 대립된 상극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하여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오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1차 협상은 복잡한 정치적 교섭의 길을 인도하는 한갓 서곡에 불과하고 끝은 아닌 것이다.

- 1949.4.20 「서울신문」

나는 정계를 은퇴하고 백범학원, 창암학원, 건국실천원양성소 등을 세워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활동에 주력하였다네. 어느덧 내 나이가 70을 넘었기에 나의 꿈과 희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후예들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통일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이 아이들이야말로 나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리라 믿었네.

그리고 나는 나의 생애 중 마지막 신년사를 발표했네.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 시장화하는데는 찬성할 수 없다.

- 1949.1.1 「신년사」

위와 같은 신년사는 곧 내 평생 추구해왔던 나의 통일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담은 글이기도 했지. 하지만 결국 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네. 게다가 결국 내가 우려했던대로 동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고야 말았던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내 가슴 속의 한(恨)으로 남아있다네.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hotscoop?Redirect=Log&logNo=70016483800)

지금까지가 나의 통일운동에 대한 이야기였네. 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대들은 더 이상 무력통일이 아닌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일세. 이미 전쟁을 겪어본 그대들이기에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동족 간의 피를 흘리는 전쟁은 있어서는 안되네. 그것은 또다른 비극과 갈등의 씨앗을 낳을 뿐일세. 비록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나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결코 헛된 노력은 아니었다고 믿네. 그것은 곧 평화통일을 향한 첫 걸음이었으니, 이제 그대들이 나의 뜻을 계승해 평화통일을 위해 또 한 번의 힘찬 걸음을 내딛여주게.

비록 그대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통일이라는 나의 꿈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나는 그대들에게서 희망을 엿보았다네. 남과 북이 서로 피를 흘리는 전쟁을 치르고, 오늘날까지도 군사적으로 대치하며 오랜 세월을 보내왔어도, 그대들은 여전히 '통일'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의 보잘 것 없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대들이 평화통일을 꿈꾸게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네. 부디 나의 꿈을 이뤄주시게. 통일을 염원하는 그대들이 있는 한, 나는 언젠가 아니 조만간 통일이 올 것이라 굳게 믿네.

(2012년 10월 19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에필로그

평생을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에 바쳤던 백범 김구. 그는 1949년 6월 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7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평생의 염원이었던 민족통일을 보지 못한 채...  그리고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김구가 우려했던대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한반도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하기까지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고아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삼천리 강산은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2013년 현재. 아직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백범 김구가 세상을 떠난지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오늘날까지도 그의 마지막 꿈인 '통일'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 통일을 이루는 것은 바로 우리 세대의 몫이다.




<출처 및 참고문헌>

1. [논문] 한국의 남북분단과 백범의 통일론, 신용하, 백범김구기념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