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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사랑과 정의 사이, 연극 '정명(正命) - 어항을 나온 다섯 물고기'

연극 '정명(正命)' 포스터 - 자료제공 : 북한인권탈북청년연합


사랑도 예술도 허용되지 않았던 공간, 북한의 민주화 혁명기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현동지'가 시를 읊자 어두운 지하실 창고의 무대는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별이 쏟아지는 벌판으로 변한다.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

서울 중구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9월 11일부터 23일까지 상연된, 연극 '정명(正命) - 어항을 나온 다섯 물고기'(이하 연극 정명) 중 한 부분이다. 연극 정명은 북한 민주화를 위해 독재자의 앞잡이에 폭탄을 던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젊은 청년 혁명가의 사랑과 열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중앙대 연극학과 이대영 교수가 소련 스탈린 체제의 고통을 고발하는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원작으로 북한 현실에 맞춰 각색한 연극이다. 또한 이 극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인 '북한인권탈북청년연합'이 기획하고, 극단 '그리고'가 협력제작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남북 청년들이 함께한 연극 정명

남과 북의 대학생들이 모여서 정식으로 무대에 올린 작품은 연극 정명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에 연극의 각색과 연출을 맡은 중앙대 연극학과 이대영 교수는 "이번 연극을 통해 남북 학생들이 서로 이해를 하고 화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오디션 장면 - 자료제공 : 북한인권탈북청년연합

이 외에도 연극 정명의 배우들을 선발하는 오디션 과정도 주목할 만 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배우 8명을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다. 8명이라는 숫자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총 10명의 배우 중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 중에서도 중앙대 연극영화과 학생 2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출연자가 초보였다고 하니 배우들의 피나는 연습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인가? 정의인가?

"나는 오늘날 이 세상에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고요. 내가 싸워서 죽기를 결심한 것도 그들을 위해섭니다."

"사랑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죠.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만도 시간이 모자라요."

젊은 혁명가 '호'와 '현동지'가 극 중에서 말한 내용이다.

연극 '정명(正命)' 연습 장면 - 자료제공 : 북한인권탈북청년연합

전체주의 국가 북한을 탈출해 북-중 접경지대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는 탈북혁명가들은 독재세력 요주의 인물인 '백공'을 처단하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결행 당일 '호'는 폭탄을 던지지 못했다. 던지려는 순간 '백공'의 차에 타고 있던 그의 어린 손자와 손녀들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와 '현동지'는 작품에서 가족과 사랑 그리고 대의명분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혁명가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들에게 '사랑과 정의 중에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일까?'라는 고민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연극 정명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과 에피소드를 알아보기 위해 김율아 조연출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취재하였다.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

▶ 연극 정명의 취지는 어떤 것이고, 이 연극을 본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길 바라시면서 연극을 기획하셨나요?

이대영 교수님은 내부적인 통일이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직접적으로 북한에 찾아가고 억지로 통일을 하자고 하는 것보다는 현재 한국에 있는 탈북자와 남한 사람이 먼저 문화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연극을 기획했습니다.

저는 이 공연을 통해서 관객분들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선뜻 사회로 나서지 못하고, 남한 사회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아서 쉽사리 사람을 못 믿고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 오디션 심사기준은 어땠나요?

각 대학교마다 오디션 공고를 냈고, 인터넷으로도 심사를 받았어요. 오디션은 보통 교수님이 뽑으셨는데요. 저희도 조금은 영향력을 미쳤어요. 심사 기준은 북한을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북한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관심이 있는 대학생이었는데요. 이 외에도 연극에 매우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모였어요. 정말 다양하게 모인 것 같아요. 저희가 유료 공연인 만큼 대사가 어느 정도는 되면서 북한을 사랑하는 친구들을 선정하게 되었어요.  


▶ 초보 출연자들이 많았던 만큼 짧은 기간 동안 맹연습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저희가 'Ten to Ten' 이라고 해서 하루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두 달 정도를 매일 연습했어요. 연습실에 매트가 있었는데, 그 매트를 깔아놓고 거의 합숙을 하다시피 했어요. 거의 밥을 먹을 때만 쉬고, 계속 연습을 했어요. 학교에서 샤워하고,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에는 안 가고 학교가 집인 것처럼 연습을 했어요.

이번에 태풍 볼라벤이 왔었잖아요? 저희는 교수님께 “교수님, 오늘은 쉬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했지만, 교수님은 “여기가 안전지대다! 아무데도 가지 말고 여기서 연습을 하자!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태풍은 문제가 아니다!” 하시던 교수님이 생각이 나네요.


▶ 남한 대학생들과 탈북 대학생들이 함께하는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이 있으신가요?

체력적으로 힘들었어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저도 거의 매일을 인후염에 성대 결정까지 오고 잠도 못 잤어요. 거의 매일 링거를 맞다시피 했어요. 이틀에 한 번씩 맞고 이비인후과도 다니고 쓰러진 친구들이 많았어요. 연습실에 공기가 좋지 않으니까요. 저는 준비하면서 대부분 3시간이상 잔 적이 없어요. 하지만 배우가 13명 이상이면 규모가 큰 공연이다 보니까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이 작품 준비한 분들 모두가 참 대견하고, 더불어 우리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관람객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세 명의 연극학과 학생들이 자신의 연습을 하기에도 바쁜데 한 번 더 봐주는 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교수님들까지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니 많이 뿌듯하네요.

지팡이 짚고 있던 '박동지' 역의 배우는 북한에서 온 친구에요. 이 작품 전에는 다들 연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친구들이죠. 주인공, '안동지' 역을 한 친구와 선생님들 빼고는 다 처음이에요. 사실 저희와 함께 연극을 준비한 탈북한 친구들도 매우 많이 변했어요. '박동지' 역을 한 친구와 같은 경우는 부모님이 놀라실 정도로 연기에 대한 본인의 재능을 찾았다고 해요. '현동지' 역을 했던 친구는 표정과 말하는 모습이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눈도 못 마주치고 불안해 보였었거든요.



공연 후 관객들과 사진 촬영을 하는 배우들


연극 한 편으로 통일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1984년 냉전시대의 동독을 묘사한 영화 <타인의 삶(2006)>에서 동독의 문화부 장관은 극작가 '드라이만'에게 "연극 한 편으로 한 인간의 신념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연극 한 편은 누군가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극이나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타인의 삶은 다르다. 영화에서는 극작가 '드라이만'의 삶이 그를 도청한 비밀 경찰 '비즐러'의 신념을 바꿔 놓았다. 통일을 갈망하는 젊은 혁명가들의 고민하는 삶을 연극을 통해 느끼고, 이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삶을 한번 다시 되돌아 본다면 연극 한 편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