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이산가족 상봉장의 모습
올해도 어김없이 모두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민족의 대명절 '설'이 다가왔다. 전국적인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방송에서는 연일 귀향길을 자제해달라고 하지만, 가족을 보고픈 마음은 그 누구도 막을 길이 없기에 다들 부푼 마음으로 고향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가족을 그리는 마음을 하늘도 알아주신 것인지 이번 설은 그 어느때보다도 연휴가 길어 모두가 따뜻한 명절을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가족들을 보기 위해 차편을 알아보고, 선물을 준비하고, 새해 연하장을 쓰는 사람들로 인해 풍요로움이 가득한 명절, 그러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고 싶을 때 가족을 볼 수 있는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의 명절을 보내고 있는 그들이 있으니 바로 이산가족이다. 모두가 가족들과 함께할 때 가장 외로운 사람들. 6ㆍ25전쟁은 60여년 전의 먼 역사가 되어가고 있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가족들과 생이별을 한 이들의 마음의 상처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물어지지 않았다. 북녘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온 이들은 더 이상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씩 시간에 무릎을 꿇고 있다.
보고 싶을 때 가족을 볼 수 있는 우리에게 이산가족의 고통은 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겪어본 적이 없기에 공감이 되지 않고, 그렇기에 그들의 아픔에 점점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 인간의 기본적인 측은지심이 남아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상생 기자단은 설을 앞두고, 북에 있는 가족 생각에 더욱 추운 겨울을 보내고 계실 이산가족 한신옥(92) 할머니를 만나 그 안타까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Q. 그 당시를 기억하기는 싫으시겠지만, 가족분들과 헤어지게 된 경위는 무엇인가요?
우리 친 오빠들은 6ㆍ25 당시 징병 되어서 끌려갔어. 그런데 1ㆍ4 후퇴 때 중국군들이 내려온다고 하지 뭐야. 그래서 북쪽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어. 사람들이 밥상에 차려놓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급하게 집을 떠났어. 그래서 더 위쪽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당장에 보이는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급히 움직이니까 난리도 난리가 아니었어. 나는 등에 작은 아이를 업고, 예닐곱살 난 큰 아이와 함께 남편, 시댁 식구들과 피난길에 올랐지. 그 많은 식구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것은 정말 한 순간이었어...
그 당시, 할머니는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이정표를 들여다보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서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 밀려오는 사람들에 의해 가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할머니에게 남은 이는 등에 업고 있던 둘째 아들이 전부였다.
가족들을 찾기 위해서 다시 북쪽으로 가시던 할머니. 모두들 남하하는 가운데 홀로 사람들을 거스르며 올라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심적 부담은 엄청난 것이었다. 중공군이 계속 내려오고 있는데 돌아가면 안 된다며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할머니를 만류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발걸음을 다시 돌려세운 것은 등에 업힌 아들이었다.
Q. 그 이후의 삶은 어떠셨나요? 숱한 고생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한참을 정신 없이 식구들을 찾다가 걷다가 하다가 등에 업힌 아이를 보니까 아들이 거의 죽어가고 있던 거야. 그 때 업힌 아이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결국 할머니는 아이를 업고 전라도에 있는 과부촌으로 가게 된다. 혹시라도 큰 아들을 찾을 수 있을까봐 전국에 있는 고아원도 다 뒤지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아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재정이 가난한 고아원에 들리기라도 하면 며칠씩 일을 해주고 돌아왔다. 혹시라도 아들이 그런 곳에서 고생하고 있을까봐 그냥 올 수가 없으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며칠씩 울고는 하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작은 아들을 위해서 강해져야만 했다. 마음을 굳건히 다지고 작은 아들을 키우는 데에 열중하셨다. 혹시라도 작은 아들마저 잃어버리게 될까 8살이 될 때까지 업어서 키웠다. 그 큰 아이를 업고 다녀서 그런지 요즘 허리가 안 좋으시다며 인터뷰 도중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내가 아들 보려고 지금까지 안 죽고 살았나봐…."
가족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지 60년,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 바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북쪽에 있는 아들이 할머니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아흔이 넘도록 살았던 것이 이 만남을 위해서인 것만 같아 너무나 감사했다고...
그러나 짧은 만남 이후에 계속해서 찾아올 그리움과 언제 또 만날지 모른다는 기다림 때문에 오히려 처음에는 만남을 거부할까란 생각도 했단다. 이산가족의 만남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휴전선이 아니라 그 만남이 한번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한반도가 온전한 하나가 되기 전까지, 이러한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계속될 것이었기 때문.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뿐, 피붙이에 대한 끌림 때문에, 자신 살아생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할머니께서는 상봉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셨다고 했다.
상봉 당시의 심정을 묻는 나의 질문에 할머니의 첫 대답은 ‘기쁘지만, 너무 슬프다’였다. 과연 이 두 감정이 한데 뒤섞일 수 있는 것일까? 상봉을 준비하던 할머니의 첫 다짐이자 준비의 시작은 절대로 울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마음 속 기쁘고 슬픈 두 가지 감정 중, 2박 3일의 짧은 만남 속에서는 슬픔을 잠시 접어두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첫 상봉의 시간, 6살 때 헤어진 아들이 60이 넘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할머니에게 세월의 무색함과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무치는 恨으로 다가와서 할머니는 너무 큰 슬픔을 느끼셨다고 한다. 눈물이 턱밑까지 차올랐으나, 60년 만의 만남에 자신의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다짐을 되새기고, 아들과의 만남 순간의 기쁨을 더 크게 느끼려 하셨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손자와의 만남은 할머니의 기쁨을 더 크게 만들었다.
나랑 코가 똑 닮은거있지..
그것도 피가 끌리는지 처음 보는 날보고 할머니라고 부르며 곧잘 따르더라고...
아들이 살아서 이 땅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던 할머니는 자신과 코가 똑 닮은 손자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끼셨고, 그때의 반가움과 감격은 60년의 세월을 잠시 잊을 만큼 컸다고 하셨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손자 ‘철수’와의 만남 때문인지 할머니에게 2박 3일의 만남은 기쁘고 즐겁게 흘러갔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슬픔은 잠시 접어둔 만남이었다. 그러나 만남도 잠시,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할머니 가슴 속 먹먹함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생전에 다시는 못 볼 수 있는 그 손자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으셨던 할머니는 손자의 이름을 ‘금강산’이라고 지어주셨다고 한다. 금강산은 누구나 항상 그리워하고 보고파 하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할머니의 말씀에서 손자를 향한 뜨거운 애정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어 인터뷰를 하던 우리의 마음까지 먹먹함이 느껴졌다.
2박 3일간의 짧은 만남이 꿈처럼 추억으로 밀려나는 작별의 순간, 할머니는 2박 3일 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남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탄 할머니는 버스 밖에서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들과 손자의 모습에 남몰래 눈물을 훔쳤고, 아들, 손자와 함께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결국 목이 메어 노래는 끝을 맺지 못하고, 버스는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할머니께서는 버스가 출발하고 차문이 닫힐 때, 그 단절감은 기약이 없는 기다림을 예고하는 것 같아, 너무나 슬펐고, 만났을 때의 반가움과 헤어질 때의 아쉬움이 미묘하게 뒤섞여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고향의 봄’, 그날 끝을 맺지 못한 이 노래가, 하루빨리 불러지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할머니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듣고 집에 온 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나는 지금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고 있어서 엄마, 아빠를 자주 볼 수 없지만 타지에서 힘들거나 외로울 때, 그리고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바로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당연히 누리는 것이 갑자기 불가능해지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양치질을 하고 있던 평화로운 일상에서, 하루 아침에 앞으로 엄마, 아빠를 볼 수도, 함께 말을 할 수도 없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향에 있는 부모님 생각이 정말 많이 났다. 빠르게 움직이는 차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해와 달은 내 위에서 나를 끝없이 쫒아오는 기분이 든다. 한신옥 할머니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족이라는 것은, 피붙이라는 것은 나를 끝없이 쫒아오는 해와 달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세월이 60년이건 600년이건 가족은 영원히 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할머니와 인터뷰를 마칠 때쯤, 가슴을 후려치는 한마디가 있었다. ‘죽어도 눈을 다 못 감고 죽을 것 같다’라는... 이 말은 매번 이산가족 인터뷰를 할 때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다. 매번 듣는 말이기에, 어쩌면 관용어구가 되어버린 말이기에, 이제는 담담해질 때도 된 것 같지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진심이 느껴지기에, 그들의 恨이 온전히 전해지기에, 무언가 가슴을 후려치는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恨으로 넘쳐흐르는 한반도, 이 땅위에 내가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근원을 알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가족의 존재, 그러나 볼 수 없는 가족을 향한 끝도 없는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하루하루 날짜만 보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아픔 역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잊고 있었다. 그것은 나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나의 아픔이 아니라고 그렇게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한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다가오는 통일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끝이 없는 긴 분단의 터널 속에서, 그 '끝'을 알리는, '통일'이 하루빨리 찾아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된 한반도 위에서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가족 손을 잡고 신명나게 '고향의 봄'을 부르는 모습을 그려본다.
*짧은 인터뷰로 이산가족의 한과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고통과 그리움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사는 젊은이가 되고싶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 땅의 많은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잠시나마 이 글을 통해 함께하고 싶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산가족에게 하루빨리 따뜻한 고향의 봄이 찾아오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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