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통일 선배, 독일의 중심에서 통일을 느끼다 (3)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

포츠담을 끝으로 베를린 일정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연수단의 방문일정도 끝으로 다가가면서 베를린을 떠나 구 동독 지역이었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베를린과 다르게 현대적인 건축물보다는 중세유럽시대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드레스덴은 이번 방문기간 중에 처음으로 비가 오지 않는 날씨여서 사진이 가장 잘 나온 날이었는데, 멋진 건축물들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드레스덴이 이렇게까지 되기에는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연수단은 드레스덴에서 통일 이후 문화재 재건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통일연수를 진행했습니다.

드레스덴시 건물을 보면 검고 하얗 부분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것은 폐허가 된 이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훼손된 것을 바탕으로 부족한 부분을 새로운 벽돌로 지었기 때문이다.


연수단은 베를린을 출발하여 독일 남동부 작센주(州)의 주도(州都). 엘베강(江) 연안의 마이센과 피르나의 중간, 베를린 남쪽 약 189km 지점에 위치한 드레스덴을 방문했습니다.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미·영 공군의 맹렬한 폭격으로 시가지가 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나, 통일 이후 전후 유서 깊은 옛 건축물은 모두 복구되었습니다.

1945년 2월 13일 이후 프라우엔 교회 모습, 2월 13일날 연합군의 폭격으로 13만 5천명이 죽었으며 드레스덴 전체 건축물 중 2채만이 온전히 남아있었다.


드레스덴은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연설이 이뤄졌던 장소입니다. 헬무트콜 서독총리가 동독총리인 한스 모드로와 정상회의를 갖기 위해 드레스덴에 방문했을 때 시민들이 헬무트콜을 연호하였고 헬무트콜은 이에 화답하는 즉흥 연설을 한 곳인데 헬무트 콜은 자서전을 발간하면서 드레스덴에서 연설이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저희 연수단은 헬무트콜이 연설을 한 프라우엔 교회를 찾았습니다. 바로크 양식 건축의 대가 게오르게 베어(George Bähr)가 설계한 프라우엔 교회는 1726년에서 1743년에 걸쳐 건축되었습니다. 1760년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 군대가 쏘아 올린 100여 개의 포탄 중 50여 개의 포탄만 맞았지만, 무너지지 않고 건재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6118일에 걸쳐 완성된 건물이 하루 만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드레스덴 시민들은 언젠가 재건축 할 것을 생각하며 무너진 프라우엔 교회의 돌들을 모아 번호를 매겨 보관했고, 독일 태생의 미국인 생물학자 귄터 블로벨(Günter Blobel)은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 어린시절 프라우엔 교회의 본래 모습을 봤던 기억을 되살리며 1994년에 프라우엔 교회 재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99년 노벨 의학상을 받은 그는 상금을 모두 재건 사업에 기부했으며, 여러 개인과 단체의 노력으로 재건 사업이 활발해졌고 2005년 재건이 끝나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연수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연수단은 라이프치히로 향했습니다. 독일 작센주(州) 남서부이며 1989년 교회들을 중심으로 동독 평화시위가 시작된 거점도시였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현대사포럼 박물관과 성니콜라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현대사포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구동독지역에서의 독재, 억압, 시민들의 저항과 1989년의 ‘평화혁명’으로 이끈 사건들에 대해 전시한 곳으로 약 2,000㎡의 면적에 3,200개 이상의 유물, 사진, 문서, 미디어 등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박물관 담당자가 저희를 직접 설명해 줬습니다. 박물관 담당자가 이야기 한 것 중에 중요한 사건은 1953년 6월 17일날 있었던 스탈린에 대항한 노동시위운동이었습니다. 이 시위는 한국의 5.18과 같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시위인데 당시에는 독재를 물러가게 하자는 급진적인 요구였지만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시위였습니다. 이 시민 항쟁이 점차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가자 동독의 사통당 정부는 매우 당황하여 소련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진압과정에서 하루 만에 동독주민 50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부상 당했습니다. 

1953년 6월 17일 시위 모습


이 시위는 2차 대전 후 소련 하의 독재에 대항해 일어난 최초의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였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정부에 반대하는 야당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거리로 나서지 않고 실내에서 전략을 구상할 계획을 가졌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동독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탈주하게 된 시점이기도 합니다. 점점 자유를 향해 서독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 수가 1961년부터 300만 명이 탈출하였습니다. 동독 정부는 젊은 고급 인력이 많이 빠져나가게 되자 당에선 탈출을 범죄로 지정하는 형법을 만들어 잡히면 징역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1961년 8월 30일 이후 장벽이 들어서고 나서부터는 통행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이 장벽은 처음에는 벽돌, 철조망 등으로 세워지다가 전기 철조망, 지뢰 설치 등으로 점점 더 강화되어 동독 주민들이 못넘어 가겠금 막았습니다.

연수단은 박물관 관계자의 해설 속에서 동독에서도 천안문사태와 같이 1953년에 시민들의 시위가 유혈진압된 사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 순으로 베를린 장벽이 처음에는 철조망이었다가 점점 굳건해지는 과정을 보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흔적만 남아있다는 것이 부러웠기도 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예상치 못하게 무너진 것처럼 북한도 언젠가는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물관을 둘러본 인원들은 월요시위가 벌여졌던 성니콜라이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성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처음 건축되었고, 15세기와 16세기를 지나면서 후기 고딕 양식으로 완성되었으며 1539년에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와 유스투스 요나스 1세가 이곳에서 설교를 함으로써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는 1980년대 초부터 매년 11월에 평화를 위한 집회 시작되었고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찌히 월요시위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위 시내 저항 모습


매주 월요일 5시에 시작하는 평화 기도회로 시작해서 점차 인권침해, 군비확장,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의 문제점에 대한 기도회로 발전 시켰고 후에 공산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모임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독 정부는 불법집회로 규정 및 억압하였습니다. 1989년 10월9일 일부 시민이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를 마친 뒤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행진에 합류 시위대의 수가 7만 명으로 늘어났으나 무력진압을 명령받았던 군과 경찰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위대는 4개월 전 있었던 중국의 천안문 사태가 재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시위에 나섰지만 결국 행진이 평화롭게 끝나면서 무혈 평화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라이프치히의 기적'은 동독 민주화 운동이 유혈사태로 치달을지, 평화적 개혁으로 진행될지를 판가름하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결국 평화적 개혁으로 진행되어 한 달 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적 큰 사건의 시발점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교회를 둘러보면서 성니콜라이 교회라는 하나의 종교공동체에서 시작한 기도모임이 독일 통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또한 우리의 상황을 볼 때 당시 기독교가 자유의 전달자적 역할을 한 것처럼, 북한 땅에도 아직까지 변화의 키워드가 남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한반도가 통일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표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평화적 움직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동독 종교인들과 시위 참가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라이프치히를 끝으로 연수단은 베를린으로 돌아와 한국으로 떠나기 위한 비행기를 탔습니다. 북한과 통일을 전공하는 저에게는 이 연수가 많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을 떠나면서 저는 양쪽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회가 통일 준비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갑작스러운 통일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저에게 했습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통일이라는게 무섭기도 하지만 꼭 해야되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독일이 겪었던 통일과정에서 어려움을 우리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의 사정을 보면 독일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에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일준비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수단이 12월 18일날 돌아오고 12월 19일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름이 끼쳤습니다. 연수를 갔다 온 바로 다음날 한반도의 정세에 큰 변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보면서 과제를 하기 위해 평소에 쓰는 USB를 컴퓨터에 연결시키면서 USB 뒤에 적힌 "통일이 미래다"라는 글자를 봤습니다. 통일은 미래이고 블루오션입니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비전 대 강연"에서 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준비하고 대비하면 희망찬 통일이 올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