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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프랑크 하우스에서 안네의 꿈을 훔치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서 안네의 꿈을 훔치다...

 

 

 

 

 

 안녕하세요? 통일부 상생기자단의 박 기자입니다.

상생기자단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던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한 해를 지나 경인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으니 정말 감회가 새로운데요!

2009년 한 해는 국내의 통일 관련 지역을 돌아다니며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녔다면

2010년에는 다른 나라에서 통일과 관련한 유사 사례를 알아보고 그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해결책을 발견하고자!!!

(말은 참 거창합니다 ... -ㅁ-)

유럽으로 특파원을 자청하고 떠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안네 프랑크 하우스로 떠나서 우리나라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아픔을 낳았던 “전쟁”이

다른 나라에 살았던 어린 소녀에게는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찾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의 아픔 대해 서술하고 싶은 것이지 전쟁간의 연관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저 함께 안네라는 소녀의 삶에 대해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도착

 

 

 

드디어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습니다!!!!!!!

스키폴 공항에 내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역으로 향하는 길 !!

중앙역에 내리니 딱 !! 상상했던 네덜란드 그 만큼!!! 도심 한 가운데로 운하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상상했던 그대로입니다 -a- 다만, 지금 온 네덜란드 시내는 공사중이라는... ㅠ_ㅠ 흑

 

#. 안네에게로 향하는 길

 

안네에게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녀가 독일군의 몸을 피해 살았던 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봅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길인데, 도심과 가까워 어린 소녀가 뛰어놀기엔 너무도 행복한 곳인데, 안네는 그 곳에서 2년을 넘게 숨어지냈답니다. 꿈많은 소녀가 언제 끌려갈지 몰라 집 안에서 약 2년을 숨어지냈답니다. 살기 위해서요.

   

 

#. 안네 프랑크라는 소녀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본명은 Annelies Marie Frank이다. 1929년 6월 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유대인 가정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고, 나치스가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1933년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다. 1939년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1941년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유대인을 더욱 심하게 탄압하자, 1942년 프랑크 가족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식료품 공장 창고와 뒷방 사무실에서 다른 유대인가족 4명과 은신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밀고함으로써 1944년 8월 4일 발각되어 독일의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1945년 3월 하노버 근처에 있는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가 언니 마고트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 프랑크가 아버지로부터 13세의 생일 축하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2년 동안 숨어지내면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1942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 2년여에 걸쳐 씌어진 이 작품은 사춘기 소녀의 성장과정과 곤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용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 이 기간 동안 동화, 단편소설, 수필 등을 썼다.

안네 프랑크의 사망 후 《안네의 일기》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버지가 발견하여, 1947년 네덜란드어(語)로 출판된 이후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은 연 방문객의 수가 50만 명을 넘는 관광명소이며, 《안네의 일기》를 각국어로 번역한 48권의 책과 가족 및 수용소 사진 등이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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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네프랑크하우스에서 만난 그녀의 삶과 죽음

 

안네 프랑크 하우스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8.50유로를 내고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면 왼쪽부터 관람이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는 직원들에게 들고 있던 배낭을 앞으로 매달라는 주의를 받습니다. 안네가 살던 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비좁은 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 경로가 매우 가파르고 좁고 경사져있어 자칫하면 타인에게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museum route를 따라 처음으로 들어간 방에는 그녀의 일기 중 몇 몇 부분들이 발췌되어 있었습니다.

 

April 9, 1944.

I know what I want,

I have a goal,

I have opinions,

a religion and love.

 

 

안네가 살던 방 안에는 그녀가 남겨놓은 낙서와 아이돌을 좋아하는 현대 사회의 꿈 많은 소녀들처럼 당시의 인기 스타들의 사진이 곳곳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ray millan, chanel, 렘브란트 등 등 ...

 

 

December 24, 1943.

I long to ride a bike, dance, whistle, look at the world, feel young and know that i'm free.

 

 

안네의 흔적을 따라 걷는 슬픔의 역사는 어느새 안네란 작은 소녀와 저를 동화시켜버렸습니다.

 

모든 전쟁 끝에 가족을 잃고 혼자만 살아남게 된 안네의 아버지 otto frank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o build up a future, you have to know the past.

otth frank 1967.

 

 

#. 전쟁은 무얼 낳는가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지 간에 전쟁을 원치 않는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을 불러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존재하고 난 이래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약 2주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가 계획 하에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물처럼 흘러갑니다. 바람을 만나면 수류가 바뀌고 새로운 지류를 만나면 서로 합쳐져 더 넓은 곳으로 향합니다. 사회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모습을 한 역사의 지류는 인류의 역사에 피고 지었으며 시대적 상황과 인류에게 미친 영향에 따라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물처럼 흐르기에, 흘러가는 대로 그저 흘러가기에, 역사는 때론 너무도 변덕스럽습니다.

 

 

냉전시대의 패러다임이었던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의 흑백논리식 사고방식은 우리나라와 같은 비극적인 상황을 낳았습니다.

냉전은 종결됐지만 적어도 우리나라만은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냉전의 잔재를 아직까지도 몸소 체험하고 있으니 이는 역사가 변덕스럽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통해 충돌을 최소한으로 만들려는 노력에 부진했던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아무것도 찍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었던 안네의 집에서 저는 약 반 세기 전에 세상을 떠난 안네의 꿈을 훔쳐왔습니다.

밝은 세상과 자유로운 세상을 향하던 그녀의 꿈을 저는 늘 마음속에 생각하며 현대사회에도 자유를 꿈꾸는 많은 이들을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하게 됩니다.

 

안네의 집에서는 탈북자들의 슬픔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역사가 그녀의 화목했던 가족을 각기 다른 수용소로 배치시켜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던 것처럼 우리 역사 속에 존재했던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아픔이란 잔재를 남겨놓았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은 늘 [명분]이란 거창한 이름 아래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분]이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전쟁의 결과는 늘 같습니다.

인류 전체가 공유해야만 하는 잔인한 아픔.

 

언젠가는 우리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분단이란 잔인한 아픔이 해소되어

안네라는 꿈많은 소녀가 그리던 자유로운 세상처럼 평화로워질 수 있길 바래봅니다.

 

지금까지 통일부 상생기자단의 박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