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 23일 늦더위 무덥던 날 수도 서울은 충격에 휩싸였었습니다. 군복을 입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무장괴한들이 인천쪽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한 것입니다. 청와대를 향하던 이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함으로써 허무하고 끔찍하게 최후를 맞이했는데요. 당시 대한민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이들은 무장공비가 아닌 실미도에서 3년 4개월동안 단내나는 훈련만 받던 실미도 특수부대 '684부대'였습니다.
▲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기간병들
실미도 특수부대는 1968년 4월에 창설되었고, 일명 '684부대'로 불렸습니다. 같은 해 1월 북한의 특수부대인 정찰국 소속 123군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해 많은 인명피해를 냈었던 1.21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창설되었습니다. '684부대'의 최종 목표는 북한에 잠입에 김일성(金日成)을 사살하는 것이었죠.
684부대원들은 강도높은 훈련과 북한의 특수부대보다 고된 훈련을 받으며 3개월 후에 인간병기로 탈바꿈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출동명령을 상부에서 내려오지를 않고, 인간보다 못한 처사와 힘든 훈련 탓에 684부대원들 또한 지쳐만 갔습니다. 아울러 1970년 8ㆍ15선언을 기점으로 남북관계의 변화가 모색되었죠. 이후 1972년 7ㆍ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평화통일안이 천명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화해분위기는 1972년 남북회담으로 이어지고 실미도 특수부대의 필요성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수류탄으로 자폭한 뒤 버스모습
결국 1971년 8월 23일 6시경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고동락했던 기간병들을 살해한 실미도 '684부대' 24명의 부대원들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빼앗아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이어 여러번의 총격전을 벌인 뒤 14시 15분경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 가로수를 들이받게 되죠. 그 곳에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죽고, 생존자 4명마저 1972년 3월 10일 사형당함으로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누가 이들에게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했을까요?
당시 684부대원들에게 탈취된 버스에 있던 한 여성 생존자는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청와대를 공격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와 담판을 짓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죽이거나..아니면 고향으로 보내주거나.."
우리는 이들을 범법자들로 구성된 것으로만 알고있지만 2004년초 1968년 3월 충북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들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이 버려진 채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간 것은 단순히 보복과 화해라는 이해관계에 따른 남북의 가벼운 선택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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