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⑦2차 국공내전, 중국공산당의 중국통일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있는 마오쩌둥 1949.10.1, 출처: 구글코리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오늘은 드디어 마침내!! '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연재 기사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차 국공합작, 그리고 2차 국공합작을 통한 중일전쟁에 대한 기사를 다루어보았는데요, 오늘은 2차 국공내전 그리고 그 결과로서 중국공산당의 중국통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기사의 말미에서 잠깐 설명드렸다시피, 공산군은 국민군만큼 일본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전면전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전선의 후방에서 교란작전, 기습작전, 게릴라작전 등 소규모 전투 및 비전면전 전투만을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연안과 화북지역에서 공산당은 스스로의 영역을 넓혀 나갔고 자발적인 민중들의 항일 부대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산당은 민중들이 공산당에 협력하는 지역인 '해방구'를 점차 확대해갔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일본군이 중국의 주요 도시와 지점들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그 사이들을 이어주는 도로와 산들은 제대로 점령하지 못하였고, 고립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넓은 농촌 지역은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항일유격대와 팔로군이 지배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중국팔로군 병사들의 모습, 출처: 구글코리아, '중국팔로군'

이러한 공산군의 행보는 장개석이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공산군이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장개석은 1938년 무한 함락을 계기로 공산당에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사군(신편제4군)사건'입니다. 장개석은 신사군을에 전투명령을 내렸으나 신사군 장교들이 이에 반발하자 장개석은 국민혁명군을 동원하여 이들을 공격하였습니다. 비록 신사군이 공산군이긴 하지만 2차 국공합작의 결의로 아군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은 신사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또한 장개석은 일본군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됨에도 불구하고 종전이후 다가올 공산당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군사력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치중하고, 미국의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기다리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후 중경에서 항일은 금기시된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과 국민당의 양쪽으로 견제받던 공산당은 1940년대에 들어서 반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해가고,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등 전선을 확대해가자, 후방의 중국전선에서 일격을 가해 미국과의 전쟁에 몰두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공산군의 해방구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공산군의 수 역시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공산군은 가만히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다시 전력을 가다듬고, 해방구에 대한 민중들의 힘을 길러 다시 일제에 반격을 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본군은 중국 대륙의 대도시 및 주요도시들을 점령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 도시들 사이를 왕래하기 위해서는 두터운 호위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산태에 이르었습니다.

중국팔로군 장교들의 모습, 출처: 구글코리아, '중국팔로군'

일본군이 진주만에 기습을 감행하여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초반에는 일본군의 우세속에 진행되는듯 하였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에게 철저히 완패당한 뒤, 일본은 점차 패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태평양 전쟁에서의 전세를 지켜보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과의 전쟁이 종결 된 후의 중국을 계획하였습니다. 먼저 국민당의 장개석은 전쟁 이후의 중국의 모습을 '중국 고유의 도덕과 기능의 회복', '국민의 건국신념과 결의의 격려', '중국 전성기인 한나라, 당나라 규모와 기백 수준으로의 부흥', 즉 유교적인 도덕윤리를 회복하고 국력과 영토를 예전에 강성했던 왕조만큼 키워 다시 도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삼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민당이 중국의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했습니다. 이에 모택동은 '연합정부론'으로 새로운 국가형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중국은 각 당파와 무소속의 대표자를 단결시켜 민주적인 임시 연합정부를 성립시키고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여, 당면 위기를 극복하여 전 중국의 항일세력을 통일해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 이후 폭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연합적인 성격의 민주정부를 만든다. 해방이후 중국 전 인민들을 이끌어 중국을 하나의 독립된 자유-민주-통일 국가로 건설한다.'

일본 오키나와에 상륙중인 미 해병대, 출처: 구글코리아, '태평양전쟁'

태평양전쟁이 점차 일본의 패망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속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각각의 방향으로 전쟁 후의 중국질서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중국에는 바로 평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남은 최후의 대결이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최후의 결전이었습니다. 즉, 2차 국공내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이 패망하자마자 바로 국민당과 공산군이 바로 무력으로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1945년 8월 말, 장개석은 모택동을 중경으로 초대하여 평화교섭을 위한 회담을 갖자고 초대하였습니다. 이 회담에는 미국대사가 함께하였는데, 당연히 미국은 국민당 정부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당은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계속 진행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공산당을 공격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할 당시 군사력은 국민군이 공산군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평화교섭을 진행했던 국민당은 결국 그 해 10월, 약 200만에 가까운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의 거점인 해방구를 공격하였고, 미국은 국민당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미국의 간섭 반대 여론이 일어나자 1946년 1월 미국특사 마셜의 조정에 의해 공산당과 국민당은 정전협정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국민당은 역시 이 정전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쟁을 중지하자는 합의를 하였음에도, 국민당 군대는 끊임없이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계속 하였습니다. 바로 만주지방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며서 본격적인 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었는데요, 만주에서의 충돌은 바로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던 국민당군과 그 지역에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군이 진입해오는 국민당군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번지자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중국을 침입하는 외부세력도 없이 오로지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당이 중국 인민들의 지지를 얻느냐'였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바로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국민당이 공산당보다 군력은 강하였지만, 중국 인민들은 해방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공산당의 정책에 더욱 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 2차 국공내전에서 전투중인 국민당 군대, 출처: 구글코리아, '제 2차 국공내전'

하지만 민심이 공산당에 기울어있는 것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차 국공내전 초기의 전세는 국민당이 공산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국민당은 1947년 3월 공산군의 심장인 연안까지 점령합니다. 하지만 공산군은 주요 도시를 빼앗기는 피해가 있었을 뿐 전력의 손실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요 도로와 산간지역을 점령한 후 게릴라전술을 이용하여 국민당 군대의 흐름을 끊어놓는 전략을 취하였습니다. 즉, 표면적으로는 국민당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이 전쟁의 흐름을 잡아가고 있는 형세였습니다.

초반에는 국민당의 우세적인 군사력으로 공산당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1년이 지난 1947년에 이르면 전세는 점차 공산당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국민당 정부의 내부적인 부패, 국민당 점령지역의 물가폭등에 의한 도시 노동자들의 폭동, 납세거부, 시위 등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반해 공산당의 점령지역인 해방구에서는 민중친화적인 정책, 토지재분배 등으로 민중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고, 부패한 관리자들에 의한 폭정과 부정부패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민심은 더욱더 공산당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산당 군대의 병력 역시 100만에서 200만으로 훌쩍 증가하였습니다.

민심도 잃고, 전투에서도 점점 이제 패배가 더 많아지자, 패배를 직감한 장개석은 1949년에 공산당에게 평화교섭을 제안하였습니다. 즉, 남경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전쟁을 중단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8개항의 평화안을 제시하면서 사실상 거부하였습니다. 그 8개항은 장개석을 포함한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른 군대 재편성,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 등이 있었습니다. 결국 장개석은 중국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고, 1949년 초부터 남경정부의 금괴와 보물, 그리고 가져갈 수 있는 문화재라는 문화재라는 것은 모두다 대만으로 가져가고, 정예부대를 대만으로 옮겼습니다.

마침내 1949년 1월에 공산군은 국민군을 격파하고 북경에 진입하였고, 4월에는 남경을 점령하였습니다.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대만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중국 공산군의 기갑사단을 사열중인 모습, 출처: 구글코리아, '제 2차 국공내전'

1949년 10월 1일, 드디어 중국 공산당은 중국 대륙의 패자가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중국대륙에는 공산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1921년 공산당이 창당된 지 28년 만인 것입니다. 주석은 중국 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던 모택동이 선출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공산당이 국민당을 무찌르고 중국대륙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1차 국공내전 때만 하더라도 국민당 군대에게 항상 쫓기던 군대였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은 끝까지 자신의 내공을 기르며, 민중들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정책으로 결국 중국의 패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7편까지 연재물을 작성한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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