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④1차 국공합작 -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지난 연재 기사에서 중국 국민당의 탄생과 중국 공산당의 탄생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드디어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손을 잡은 '1차 국공합작'에 대해서 기사를 쓰고자 합니다.
중국 국민당, 출처: 구글코리아, '중국 국민당'
위안스카이에게 중화민국 총통자리를 주고 물러난 쑨원이, 위안스카이가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군주제로 다시 돌아가려하자 1919년 중화혁명당을 일본에서 창당했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민당을 창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쑨원은 혁명동지들의 거점을 중국 국민당의 이름으로 만들었지만 아직 가야할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쑨원의 중국 국민당의 광동정부와 연합한 중국 남부의 군벌들과의 소통과 협력이 원활하지 않았고, 국민당의 내부에서도 반동분자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쑨원은 군벌타도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드디어 1920년에 쑨원은 군벌타도를 위한 북벌(국민혁명)을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북벌 혁명군의 내부는 안정되지 못하였고, 내부적으로도 배반하는 자들이 발생하자 쑨원은 국민당의 힘만으로는 혁명의 완수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세력들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쑨원의 국민당이아니라 북방의 군벌세력이었습니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서양국가로부터 국제적은 원조와 협조는 기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은 쑨원의 혁명운동에 방해요소가 되었습니다.
중국 국민당 회의장, 출처: 네이버, '1차국공합작'
이러한 어려운 상황속에서 쑨원이 손을 뻗은 곳은 다름아니라 공산당 진영이었습니다. 쑨원이 사회주의 세력에 손을 뻗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1.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이 중국 인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점
2. 소련 공산당의 우호적인 태도와 중국과의 불평등조약 폐기
3. 소련의 반제국주의적인 입장
4. 중국 공산당이 일찍이 노동자 조직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점
5. 공산당 특유의 훌륭한 사상적 결속과 당 조직의 엄격한 규율
6. 5.4운동 이후의 중국의 젊은 세대가 품고 있는 열렬한 민족주의 감정과 고조된 민중정신을 소유.
7. 중국 공산당의 제국주의와 군벌주의 반대
등과 같은 이유로 쑨원은 서둘러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의 제휴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쑨원이 근본적으로 중국 공산당과 제휴를 추진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공산당의 노동자와 농민과의 연계 그리고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이용하여 국민당을 개편하고자 함
2. 계급투쟁을 하는 공산당이 만약 신속하게 성장한다면 그들 역시 결국 국민혁명사업을 전복시킬 것을 우려, 그리하여 차라리 빠른 시일내에 그들을 흡수, 동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3. 소련을 지원을 받고 있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 국민당과 적대관계에 있는 다른 군벌들과 협력하면 더 큰 문제가 될 것을 우려
이렇게 형식적인 이유, 원초적인 이유 아래 쑨원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과의 제휴를 준비해나갔습니다. 소련은 사실 처음에는 북방 군벌들과 제휴를 시도했지만, 친 서양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북방 군벌들은 소련의 제의를 모두 거절 하였습니다. 결국 소련 역시 남방의 중국 국민당에게 접근하게 되었고, 쑨원의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모습에 소련은 중국 국민당과의 제휴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코민테른 전당회의 포스터, 출처: 구글코리아, '코민테른'
그리하여 결국 1923년 1월 12일, 소련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원들에게 국민당에 가입하여 그들과 함께 부르주아 혁명에 동참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천두슈는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사실 꺼려하였지만 코민테른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천두ㅠ는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의 노동자, 농민, 당원들에게 부패시키는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일부 중국 국민당의 당원들 역시 중국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에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쑨원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제국주의 반대 및 군벌 반대에 힘쓰고 있는 이상, 공동투쟁을 위해서 양당은 협력해야한다고 설득하여 결국 공산당원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 제휴를 하고, 서로가 한 팀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융합되기 어려운 현실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국공내전은 예정되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당원의 부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개인의 명의로 가입을 허용하여 국민당에는 공산주의자와 기존의 국민당원들이 함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쑨원은 국민당 전체의 규칙과 목표에는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소련과의 협상에서 배제하였습니다. 즉 쑨원은 삼민주의가 사회주의 정신과 바뀌어질 수 없음을 명료히 밝혔습니다.
과정과 내부적으로는 좌우간의 알력과 불균형이 조금씩 보이는 그런 상황이었지만 쑨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그러한 분열과 갈등은 표면화되지 않은 채로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으로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1차 국공합작 시기의 장개석과 모택동, 출처: 구글코리아, '1차국공합작'
이것이 바로 '1차 국공합작'인 것입니다.
다음편에서 국공분열과 1차 국공내전에 대한 기사로 연재물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였습니다.
'대학생기자단 > 톡톡바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⑥2차 국공합작 (1) | 2016.12.06 |
---|---|
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⑤1차 국공내전 (2) | 2016.12.06 |
평범한 남한 대학생들이 말하는 통일이란! (0) | 2016.11.30 |
북한의 선전나팔, 역사 (2) 고려 (0) | 2016.11.27 |
트럼프 당선인 북한과의 소통 시사. 남북한 통일 이뤄지나 (0) | 2016.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