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⑥2차 국공합작 -

제2차 국공합작에 승인한 후 함께 자리를 가진 장개석(우)과 마오쩌둥(좌), 출처: 구글코리아, '제2차 국공합작'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오늘은 지난 '1차 국공내전'의 기사에 이어 바로 '2차 국공합작'의 기사로 연재물 시리즈를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국민당의 장개석 군대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에 맹공격을 퍼부으며 연 차례 공세를 퍼붓고 있을 때, 만주에서는 전쟁의 기류가 점차 맴돌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일본군이 1910년 조선을 병합한 후, 대륙진출의 야망을 점점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대륙침략의 시발점인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강행하였습니다. 이후 성공적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1932년 만주에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합니다. 만주국의 왕은 바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입니다. 일본 군부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그들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왕으로 만들어 꼭두각시로 삼은 것이죠.

일본제국군의 만주 점령 및 만주국 수립 선전 포스터, 출처: 구글코리아, '만주사변'

이렇게 일본의 중국 침략이 가시화되자, 민중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반일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작 대외정책과 외교에 힘써야 할 정치가들은 서로의 이념을 쫓아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전쟁에 휘말리고 있었지만, 민중들은 그들의 민족을 공격해오는 일본을 결코 모른척하지 않았습니다.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학생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시위와 파업, 대중집회가 개최되었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 그리고 정부에 즉각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반일 운동을 펼쳤습니다.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고 있고, 민중들 사이에서 반일운동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드디어 공산당이 먼저 국민당에게 항일투쟁을 위한 재결합을 제시하였습니다. 장개석의 공세에 대패한 공산당이 대장정을 시작한 후, 1934년에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고, 뒤로 물로나서 국민당과 다시 대결하는 것이 아닌 중국인민을 위해 일본과 싸우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공산당이 먼저 국민당에 재결합을 제시하였지만 순탄하게 다시 재결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일본은 피부병에 불과할 뿐이고, 공산당은 심장병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먼저 처치해야하는 것이 옳은 순서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공산당 소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1935년에 만주를 넘어 하북, 산서, 하남성을 지배하자 민중은 더욱 거세게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투쟁을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공산당 역시 대장정을 마무리한 후, 국민당과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닌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고, 재차 국민당에게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우자는 제의를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장개석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며 연안에 있는 공산군을 먼저 소탕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때,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사건일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시안사건'입니다.

시안사건은 장학량이 시안에 주둔중인 장학량 부대를 독려하기 위해 방문한 장개석을 시안(서안)에 강제로 구금하여 강제적으로 다시 공산당과 재결합하여 항일투쟁할 것을 요구한 사건입니다. 장학량이라는 사람은 '장작림'의 아들로서 장작림은 만주군벌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러나 장작림은 일본 관동군에 의한 1928년 만주 열차 폭파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였습니다. 그 이후 장작림의 아들인 장학량이 사망한 장작림의 뒤를 이어 만주군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아버지를 죽인 일본에 대항해 항일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으로 일본군이 만주를 공격하자, 결국 장학량은 패퇴하여 만주를 일본군에게 뺏기고 근거지를 북경으로 옮긴 후 국민당에 들어가 장개석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즉, 시안사건은 장개석이 그의 부하인 장학량에게 구금되어 강제로 항일연합전선을 강요받은 사건입니다. 결국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 들이고, 자신은 구금에서 풀려났습니다. 이후 장학량은 10년형을 받고, 1949년 장개석 정부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수십년을 보내게 됩니다.

시안사건의 주인공 장개석(좌)과 장학량(우), 출처: 구글코리아, '시안사건'

이 때, 장학량이 장개석을 구금한 이유를 전국적으로 배포하여 그의 행동을 정당화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남경 정부를 개편하고 각당 각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책임을 질 것
2. 모든 내전을 정지할 것
3. 상해에서 체포된 애국적 지도자를 즉시 석방할 것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5. 민중의 애국운동을 개방할 것
6. 민중의 집회 · 결사 등 모든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의 유언을 확실히 실행할 것
8. 구국회의를 즉시 소집할 것

비록 장개석이 자발적으로 공산당과 손을 다시 잡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장개석 역시 중국인민들의 항일연합전선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고, 결국 장개석은 공산당의 주은래와 담판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서 12월 25일 장개석은 석방되었고, 장학량의 요구는 관철되었습니다. 이 약속을 문서화하자는 주은래의 말에 장개석은 문서화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장개석은 '내가 말한 것은 성실히 지킬 것이고, 행한 이상 결과가 반드시 있을것이다.'며 문서화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장개석이 석방되어 돌아온 국민당은 당대회를 열어 시안사건 이후의 당 정책 방향성에 대해서 논의 하였습니다. 이 때 공산당은 국민당에게 다음의 제안서를 보내왔습니다.

1. 내란을 중지하고 국력을 집중하여 외적에 대항할 것
2.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범을 석방할 것
3. 각당 각파의 대표자회의에 의한 공동구국의 실실

국민당 내부에서 이러한 공산당의 제의와 앞으로의 당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국민당은 공산당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제2차 국공합작에 합의한 후 함께 자리를 가진 장개석(앞줄 가운데)과 마오쩌둥(앞줄 오른쪽), 출처: 구글코리아, '제2차 국공합작'

마침내 1937년 9월 22일, 제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습니다. 장개석은 제 2차 국공합작을 승인하면서도 끝까지 마음내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본보다도 먼저 뿌리뽑아야 할 대상인 공산당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지로 맞아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니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하지만 않았다면, 국민당이 공산당을 뿌리뽑을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린 장개석은 미래에 자신이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으로부터 쫓겨날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공산당의 제의를 수락한 국민당은 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하게 되었고, 기존에 불법적인 정치인사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던 정치범들을 해방하였고, 국민당 1당 체제에서 벗어나 공산당을 포함한 여러 당들을 참여시켰습니다. 그리고 공산당 역시 토지개혁의 중지, 소비에트 정부 해체,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받는 지방정부로의 편입 등을 골자로 하는 국민당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과 국민혁명군 신편제4군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돌격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군, 출처: 구글코리아, '중일전쟁'

그렇다면 실제로 공산당은 항일전선에 적극적으로 싸웠을까요? 결론을 말하면, 아닙니다. 1937년, 드디어 중국대륙에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한 일본군과 가장 적극적으로 맞선 것은 국민당 군대였습니다. 그렇다면 공산군은 아예 싸우지 않았냐? 그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항일이라는 명분은 국민당에게 수세에 몰려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던 자신들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위함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싸우기보다는 눈치보며 소규모로 전투를 벌이고, 유격전술을 주로 행하였으며 소위 공산당의 구역인 '해방구'확장에 몰두하였습니다. 실제로 중일전쟁사를 살펴보게 되면, 대규모 전투 및 전투 경과를 살펴보면 모두 국민당 군대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제의한 항일전선은 단지 그들의 경각에 달린 명줄을 연장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고, 실제적인 싸움은 국민당 군대가 모두 진행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군사력은 오히려 공산당이 국민당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국민당이 일본과 싸우면서 힘을 빼는 동안 공산당은 뒤에서 실력을 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국민당 역시 그러한 공산당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일본군과 대적하고 있는 상황속에서 예전만큼 강하게 공산당을 대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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