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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REPORT ⑤중국경제특구


중국경제특구의 태동


경제특구는 핵심적으로 중국 개혁개방 정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1950년대 중국은 경제적 부흥을 위해 대약진운동 마오쩌둥의 주도하에 1958년부터 1960년 초 사이에 일어난 노동력 집중화 산업의 추진을 통한 경제성장운동을 펼치는 등의 노력을 펼쳤지만, 현실과 맞지 않는 정책, 흉년, 소련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지원 감소로 1960년대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한 가운데에도 자립경제를 고수했습니다. 1960년대 중국은 대약진운동을 수정해 농업을 위주로 하는 경제정책을 펼쳐, 현상유지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공업 현대화를 주창하는 개혁개방 세력이 공산당 내부에서 힘을 얻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개혁개방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대의 데탕트 국면은 중국으로 하여금 전향적인 대외적 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고, 이는 개혁개방 세력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대약진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를 주창했던 공산당 내 급진 세력에 대한 책임론도 대두되어, 개혁개방 세력은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계의 전면에 나선 것이 1975년 4개 현대화를 발표함으로써 개혁개방 정책의 기반을 닦은 저우언라이(周恩來)다.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개혁개방 세력은 1978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큰 규모의 대중 계급투쟁이 종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개혁개방 노선을 펼칠 것을 천명함했다. 이로써 개혁개방 시대가 개막하였다. 1979년에는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등 덩샤오핑 세력이 집권하고, 1982년 덩샤오핑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중국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세력은 가장 우선적으로 중국이 고수하던 농업, 상공업, 수공업 중심의 경제발전론을 비판하고, 맑스의 사적 유물론에서 언급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단계인 사회주의를 재해석했습니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이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중국 당국의 믿음은 현실가 괴리되어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들이 제시한 새 노선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맑스가 초기에 지적했으나 레닌 이후 변질되고 삭제되다시피 한 ‘자본주의의 충분한 발달’을 이론적으로 재구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은 사회주의사회이긴 하지만 여전히 매우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중국이 사회주의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매우 미흡한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선부론’이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개혁개방세력은 1958년 이후의 대약진운동으로 대표되는 중국공산당의 기존 경제정책은 생산력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생산관계를 억지로 주입하려 한 비현실적 정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국가현실적으로 사회주의이론적으로나, 생산력 자체를 끌어올리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개혁개방세력은 개혁개방에 있어 경제구조개혁, 정치체제개혁, 정신문명건설이라는 3대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경제특구는 경제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경제구조개혁은 경제적 활동에서 혁명적 자각성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에, 이기적 자발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특성을 가미하도록 한 것입니다. 기업의 독립성을 보장해 자주적 경영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기업과 같이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해 분업적 기업 관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또한 이를 원활히 하기 위해 시범케이스이자 경제적 문호개방을 위한 경제특구를 지정하고, 해외자본을 유치하며, 기술을 도입하고 무역제도를 개혁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경제특구 곳곳을 각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일정한 분권을 실시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도 중국이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에서 이탈하여 자본주의적, 혹은 제국주의적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덩샤오핑은 이를 바탕으로 중국을 ‘정신문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생산성을 향상시켜 고도의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건설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혁개방을 위한 노력의 첫 단추로, 개혁개방의 일종의 실험장이자 첫 시작점인 경제특구가 지정되고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경제특구의 특징



초창기 경제특구


초창기 중국 경제특구로 선택된 션젼, 주하이, 샨터우, 샤먼 등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바다에 인접해 있어 대외적 교류가 원활하다는 점이며, 해당 도시가 역사적으로 개방을 했던 경험이 있거나, 지리적 위치가 국가 중앙 및 주요 도시와 괴리되어 있어 특구 지정의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타 지역으로 파급효과가 나지 않거나, 가까운 곳에 이미 활성화된 큰 시장이 있다는 점 등입니다. 대표적인 도시가 샨터우입니다.


다만 경제특구로 지정된 지역도 국가의 주요 도시에서는 상당히 떨어져있다는 문제가 있었으므로 기초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외자의 유치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또한 다른 주요 도시의 장점들이 경제특구에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중국은 이를 ‘외인내연’(外引內聯, 밖에서 끌어오고 안에서 잇는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션젼의 경우를 보면, 대외적으로 대출, 차관, 토지임대, 외자은행 유치 등의 방법으로 외자를 유치하고, 베이징, 상하이 등지의 유수한 인재들을 배치했습니다. 이에 션젼은 국내총생산액 35.9% 성장, 공업총생산액 57.4% 증가 등과 같은 세계에 유래없는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경제특구는 지역적 자율성을 바탕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중국의 전체적 경제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경제특구를 지정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특구가 국가라는 전체의 일부라는 차원에서는 발전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중앙정부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지방정부의 자율성이 상당히 보장되었습니다. 중앙정부가 지리적 위치, 정치적 효과, 대외관계 등 다양한 요건을 검토하여 경제특구를 선정하면, 경제특구에서는 외자의 유치, 기술 도입, 대외적 경제협력 등 전향적인 정책들을 자율적으로 펼쳤습니다. 


이를 위해 중앙정부는 경제특구에 여러 특혜를 부여하였습니다. 법인세를 여타 일반 지역에 비해 낮게 책정하거나, 무역, 금유, 수출용 생산 등의 분야와 관련해 타 지역에는 범법행위인 것이 경제특구에서는 합법이 되도록 한 것이 그것입니다.


또한 경제특구는 철저하게 정경분리의 원칙 하에 운영되었습니다. 중국 중앙정부는 경제특구가 정치특구가 아니라 경제특구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것이 중국 특색적 사회주의의 대표적 사례라고 홍보하였습니다. 물론 어떤 사회에서든 정치와 경제가 완전히 분리되지는 못하지만, 경제적 변화가 정치 영역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또한 정치 영역이 경제적 변화에 해가 되지 않도록 일종의 정신적 기준을 명확히 세운 것입니다.


이와 연관된 경제특구의 또 다른 특징은, 군사적으로 긴장상태에 놓여있지 않을 때 경제특구도 활성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례가 샤먼입니다. 샤먼은 바로 건너편에 있는 대만의 섬인 진먼과 몇 십 년 가까이 군사적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큰 규모의 국지전도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안관계가 개선되고, 소삼통(통항(通航), 통상(通商), 통우(通郵)) 등을 바탕으로 샤먼-진먼 간 비공식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자 샤먼 특구도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 지역이 개발되면 주변 지역에 큰 투자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개발된다는 소위 낙수효과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즉 점-선-면의 개발은 최초 몇 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해 개발한 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지역도 특구로 지정해 노력을 들이는 것입니다.


국가의 대내적, 대외적 정치경제적 상황도 상당부분 경제특구와 개혁개방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덩샤오핑이라는 지도자의 존재로 인해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발전이 압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또한 중국의 저렴한 인건비가 해외 자본의 투자에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70년대의 데탕트와 90년대의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중국이 국제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공간이 확장되고 시장이 넓어진 것, 그리고 80년대 전후 아시아 전체적 경제 성장도 중국에게 가까운 시장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경제특구 전략의 주요 성공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1970년대 이후 개혁개방정책을 펼치면서 그 기초단계에 경제특구를 두었으며, 또한 경제특구는 개혁개방의 전반에 주요한 요소였습니다. 경제특구를 시작으로 중국은 오늘날 G2라고 불리울 정도로 융성하는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경제특구 정책과 실태를 살펴보는 일은 중국 개혁개방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선결과제인 동시에, 북한의 경제특구 및 경제정책을 파악하는데도 유의미한 시사점입니다. 중국의 경제특구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중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평가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