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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자 조선인을 죽여라" 민생단 사건 ②


(["첩자 조선인을 죽여라" 민생단 사건 ①]에서 이어집니다)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한 동시에 만주 전역을 지배한 일본, 그 속에서의 비극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게, 만주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조선인들은 눈엣가시였습니다. 일본이 만주를 철저히 지배하는데 제동을 건 대표적인 사건이 1920년에 있었던 청산리 대첩입니다. 20,000여 명이 넘던 일본군이 이에 맞선 2,000여 명의 독립군에게 대파된 이후,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군의 분노는 거셌습니다.


민생단의 탄생


일본군은 만주 지역의 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데리고와 1931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설립합니다. 이에 중국인들이 크게 반발하여, 조선인 항일운동가들과 중국인 항일운동가들이 연합하여 일본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무장투쟁의 주요 세력이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 1국1당 원칙(한 나라에는 한 개의 사회주의 정당만 허용)에 따라 당을 설립할 수 없었는데, 이에 중국공산당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인-중국인 연합 유격대의 대표 사례인 동북항일연군(1936년 결성)


이에 일본은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하여 1932년 2월 '민생단'을 조직합니다. 민생단은 '친일반공'을 기치로 내세우고, 일본의 조선총독부와 간도일본총영사관의 후원을 받으며 만주의 항일 유격대에 밀정으로 침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일본은 조선인 친일주의자들을 대거 영입했으나, 만주 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이 강력하여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5개월만인 1932년 7월에 정식으로 해체됩니다.


한편 일본군은 민생단이 활발히 활동하던 1932년 4월부터 만주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인 마을을 무차별하게 토벌하는데, 이후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물리적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듭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토벌이 끊임없이 지속되자, 항일투쟁가들은 민생단 세력이 밀정으로 숨어있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송노톨 사건


그러던 중 민생단이 사실상 해체된 이후인 1932년 8월, 만주국 공무원으로 일하던 조선인 '송노톨'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1주일만에 헌병대를 빠져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민생단의 존재에 무척 예민해져있던 조선인과 중국인 무장투쟁가들은 송노톨이 일본의 매수를 받은 것이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2개월 후인 1936년 10월에는 항일 유격대원들이 일본군 몇 명을 생포하게 됩니다. 그런데 생포된 일본군들은 "송노톨은 헌병에 매수된 민생단 조직원"이라고 진술합니다.


민생단이 완전히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아직 민생단원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한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동만특위)는 송노톨을 데려다 그를 고문하여 민생단원의 명단을 요구했습니다. 송노톨은 몇 명의 조선인 간부의 이름을 거론하는데, 이에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는 민생단원을 찾아내어 처형하는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이 시작됩니다.


박두남 사건


반민생단 투쟁은 초기에는 그 기세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민생단이라는 어렴풋한 의심이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끈끈한 연대에 커다란 위협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송노톨 사건이 있었던 이듬해인 1933년, 조선인 유격대원이었던 박두남이 중국공산당 조선인 당원 반경유를 사살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도주한 박두남은 이후 일제에 항복하고 유격대원을 토벌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을 크게 동요하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 유격대원들, 조선인 사회까지 크게 동요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이 사건을 가벼이 보지 않고, 동만특위에게 민생단원인 일제 밀정들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물론, 조선인들도 민생단원에 대한 큰 적대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생단원을 찾아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조선인이 민생단원으로 활동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동만특위는 잡아들여야하는 민생단원의 할당량을 정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민생단원이라는 명목 하에 무자비하게 숙청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만특위의 간부나 유격대 간부에게 밉보이는 조선인들이 민생단원으로 지목되어 처형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사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만특위의 간부였던 리상묵은 조선인 유격대원 중 70%가 민생단원이라고 주장하여 60여 명의 조선인 유격대원을 처형하였고, 지주 출신, 지식인, 조선공산당 활동자, 심지어 밥을 먹다가 밥알을 흘린 사람도 민생단원이라는 이름으로 처형했습니다.


송노톨 사건 이후인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총 1,000여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민생단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습니다. 실제 일본 문건에 따르면 실제 민생단원은 약 7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결국,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를 이간질시키고자 했던 일본군의 계획이 크게 성공하고 만 것입니다. 이후 조선인들의 활동은 만주 지역에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생단 관련 자료를 불태우는 김일성을 그린 북한의 선전물


민생단 사건은 북한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조선인 투쟁가였던 김일성 또한 민생단원으로 의심받아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는데, 이 때는 민생단 사건의 열기가 식었을 때였고, 또한 친분이 있었던 중국인의 도움으로 김일성은 처형당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은 민생단 사건으로 유격대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유격대를 조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이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민생단 관련 자료를 모두 불태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즉, 민생단 사건으로 이 때 김일성과 함께했던 세력이 '혁명세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이를 김일성을 숭배하는 자료 중 하나로 이용합니다.


소설 <밤은 노래한다> 표지


간도 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죽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경계에 서 있었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민생단도 되고 혁명가도 될 수 있었다. (...) "모든 건 단 한 번뿐이라오. 단 한 번의 오류만으로도 인민들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오." - <밤은 노래한다> 中


민생단 사건을 다룬 소설인 <밤은 노래한다>에서 작가 김연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생단 사건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조선인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입니다. 민생단 사건은 독립운동이 단순히 일본에 저항하고 일본에 의해 고통받았던 사건이 아니라는 것,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스파이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이나 컸었다는 것, 독립운동을 하던 유격대원들과 모든 조선인들이 서로마저 두려워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회의감을 품어야 했던 처절한 일이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