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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첩자 조선인을 죽여라" 민생단 사건 ①



민생단, 한인 독립투사들의 아픔


최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한 영화가 유행을 끌고 있습니다. <암살>, <동주>에 이어 김지운 감독의 <밀정>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영화 속 독립투사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투사들 간의 끈끈한 정과 '우리'를 사랑하는 모습은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통상적으로 항일운동을 생각하면 한국(당시 조선)과 중국이 긴밀하게 협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가령 3.1운동이 중국 5.4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중국과 긴밀히 협조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만주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인명이 중국인은 물론 같은 조선인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던 '민생단 사건'이 그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왜 갑자기 일제에 대항하는 동지였던 조선인들을 학살한 것일까요? 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의 시대상을 간략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장작림 폭살 사건(1928)


1905년 일본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청나라에 간도를 넘기는 대신, 철도부설권을 얻어냅니다. 이후 이 철도를 보호해야한다는 명분으로 간도 지역에 '관동군'이라는 이름의 일본군이 파견됩니다. 23년이 지난 1928년, 일본 군부는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만주의 군벌이었던 '장작림'이라는 중국인을 이용합니다. 장작림은 중국 공산당, 국민당 등과 세력이 비슷하고 북경을 수도로 뒀던 '북양정부'의 총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작림이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에 비해 세력이 열등하자, 일본군은 장작림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판단했고, 만주를 직접 지배하기 위해 장작림을 폭살시킵니다. 이것이 장작림 폭살 사건(황고둔 사건)으로, 이는 일본 정부와 관계가 없고 전적으로 일본 관동군이 계획하고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중국 북부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군벌이었던 장작림


장작림은 장개석과 전면전을 펼칠 정도로 유명한 인사였으므로, 장작림 폭살사건은 세계의 주목을 크게 받게 됩니다. 최초 일본 군부는 중국인들이 벌인 소행이라고 둘러댔으나 의혹이 많았고, 세계적 관심을 무마시키기 위해 히로히토 일왕은 중국 경찰과 함께 장작림 폭살 사건의 전모를 밝히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조사 결과 장작림 폭살 사건의 배후에 일본 관동군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일본 내부에서도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인 일본 군부를 징계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됩니다.


장작림 폭살사건 현장


당시 일본 내각총리였던 다나카 기이치는 육군 대장 출신이었음에도 군부를 징계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폭살 사건에 일본 관동군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했음에도 일본 군부에서는 관동군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반대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주의가 뻗쳐나가는 최선봉에 있던 것이 관동군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총리로서 왕의 명령을 대놓고 어길 수는 없었던 다나카 총리는, 군부가 장악하다시피 한 내각을 총개편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달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고 맙니다.


장작림 폭살 사건의 배후로 밝혀진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이 사건은 일본 근대사에서도 무척 중요한 사건으로 꼽힙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군부가 사실상 일본의 정부보다 영향력이 커져 일왕조차 군부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고, 일본이 파시즘적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군부, 특히 관동군 간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징계를 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일본의 학자들은 이 때 정부가 군부를 잘 통제했더라면 태평양 전쟁과 두 번의 원폭 피해도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만주사변(1931)


일제가 간도협약을 통해 중국에게 간도를 파고 얻어낸 철도부설권으로 남만주에 만들어낸 '아시아'호


장작림 폭살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반일투쟁을 격렬하게 시작했고, 이는 일본 제품에 대한 대대적인 보이콧으로 이어집니다. 1년 후인 1929년에는 미국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합니다. 일본은 만주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이 겹쳐 만주에서 큰 손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본토의 경제에도 위협을 가하는 심각한 상황이 닥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관동군은 만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야겠다는 생각을 품었고, 일본 군부는 이를 바탕으로 일본 내부에서 '만주를 점령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의식을 조장합니다. 일본 내부에서도 경제적 위기가 겹쳐 만주침략에 대한 여론이 샘솟기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주를 침탈하기 위해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한 일본 관동군


일본 관동군은 또 한 번 정부로부터 아무런 명령도 없는 가운데 독자적으로 만주를 전면적으로 침탈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이 직접 만주 철도를 폭파시키고는 이것이 중국 국민당 동북군의 소행이라고 왜곡하여, 일본 관동군을 대대적으로 만주지역에 투입시키고 만주를 점령한 것입니다. 이는 심지어 일본 관동군 사령관의 계획이 아니라 영관급의 하위 참모들만의 계획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에 힘입은 동시에 군국주의를 더욱 가속화시킨 사건입니다.


동북3성. ⓒ조선일보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 국공내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이 사건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고, 20만 병력이었던 국민당 동북군은 2만이 되지 않는 일본 관동군에 밀려납니다. 일본 관동군은 만주 침략 5일만에 요동성, 길림성 전역을 점령하고, 3개월 이후에는 흑룡강성까지 중국의 동북3성을 모두 장악합니다. 일본의 내각 정부도 어찌하지 못한 관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1) 류타오후 사건으로 만주를 침략하여 심양(봉천)에 입성하는 일본 관동군. 그리고 류타오후 사건과 만주사변을 계획한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 대령(2)과 이시하라 간지 중령(3)


만주지역을 일본 관동군이 완전히 지배하게되자,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일본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1919년 3.1운동 등 이후 일본은 문화정책을 펴려고 했지만, 일본 내부에서도 군국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이 정국을 휘어잡기 시작한 상황이었고, 만주에서 관동군의 무자비한 탄압 정책은 더욱 극심했습니다. 그 결과, 만주지역에는 피비린내나는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첩자 조선인을 죽여라" 민생단 사건 ②]로 이어집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