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북한, 1968.01.21 푸에블로호 사건
푸에블로호란? 푸에블로호는 각종 첨단장치들이 갖춰져 있던 첨보함입니다. 미국의 국가안적국(NSA) 관할 하 1968년 당시 북한의 기밀 정보를 수집하는 첨보 임무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1968년 1월 23일 오후 원산 앞바다에서 승무원 83명을 태운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게 장악 당하여 원산항으로 나포되었습니다.
담시 남북한의 관계는 이틀 전인 1.21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푸에블로호가 나포되던 시각 서울 근교와 경기도 북부 산악 지역에서는 청와대 습격부대와 국군 사이에 교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정부는 사건 발생 즉시 한반도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시켰습니다. 즉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전투기 F-105 1개 비행대, F-102 2개 비행대, 당시 최신예 전투기 F-4D 4대 등 총 154대의 전투기를 남한 내 공군기지에 배치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의 긴장 상태는 최고조에 이르러 제2의 한국전쟁이 우려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한편 미국정부는 푸에블로호 선원 송환을 위한 북미 단독 비밀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밀회담의 성격을 북한은 국가 차원으로 확대하려 했고 이런 북한의 의도를 간파한 미국은 가급적 북미회담을 모호한 성격으로 처리하려 했습니다.
북미양국은 5차 회담까지 회담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이야기가 오갔는데, 결국 북한의 의도대로 이는 공식회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협상이 타결되면서 북한이 작성한 문서에서도 이러한 북한의 의도는 짙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북한은 문서에서 '미합중국 정부'라는 미국정부의 정식국호를 2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북한정부의 정식국호가 7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북한은 왜, 무슨이유로 이랬던 것일까요?
북한은 판문점 북미회담의 성격을 국가적 차원의 협상으로 규정하려고 세심하게 노력했습니다. 이는 미국정부로부터 북한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부는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로 적대적인 위기상황을 창출해야 미국과의 대화가 시작한다는 이상한 공식이 출현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북한은 그 대화를 북한정부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받는 기회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제9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신동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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