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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애와

팔고 있는 모성(母性)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당신 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백 원을 쥐어주자

그 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 원으로

밀가루빵 사 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이 시는 탈북시인 장진성씨가 2008년 출간한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의 표지를 장식하는 시입니다. 장진성씨는 북한에서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북한 노동당사에서 선전 문필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당시 김정일에게 '나의 시인'이라고 불릴 만큼 장래가 유망하였는데요. 북한에서는 시인을 '귀족 작가'라 부르며 우대받았습니다. 북한 사회의 이념 통치를 위해 각 주민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도구로 시가 가장 적합하고 그 '도구'를 창작해 내는 것이 시인들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장진성씨 또한 북한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국에서 복무하는 햇수가 증가할수록 김정일의 복잡한 사생활과 북한 고위층과 주민들간의 생활 괴리를 느끼게 되었고  북한 사회의 왜곡을 통탄하며 2004년 탈북을 결행하게 됩니다. 북한식 표현으로 하자면 '출신성분'이 좋은 그도 북한을 떠나 온 것을 볼 때  북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회의감이 점차 확산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선 탈북 기로에서도 자신이 창작한 300편의 시를 적은 공책을 안고 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시집을 통해서 그 이유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데요.

 

 

 

<장진성씨가 탈북시 품고 왔다는 노트 -사진 출처: blog.naver.com/postview>

 

 

 

 ' 두만강을 넘을 때 신분 노출이 우려되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나는 남한으로 가면 반드시 300만 아사(餓死)를 폭로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북한에서 메모했던 글들을 품고 넘었다.'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머리말 중)

 

  

 

  그의 시집에 실린 약 70편의 시들은 북한 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양식에 관한 문제, 굶어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 심각한 인권 유린의 현장 이야기, 북한 이탈주민에 관한 이야기 등 북한 사회에 관해서 이성적으로 느끼고 있던 각종 문제들을 담담하지만 한(恨)의 정서를 담은 호소로 우리의 감정을 요동케 합니다.

 

    그는 전쟁도, 자연재해도 아닌 일상 속에서 300만이 굶어 죽는 나라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과 1994년부터 1999년 불과 4년 사이에 300만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한 일을 북한 정부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며 가볍게 치부해 버리는 것을 애통해하며 대부분이 직, 간접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된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남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계로 발표된 치수로만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에 대해서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러한 우리의 북한 사회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정치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을 동정과 사랑으로 변모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