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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서평] 장성택의 길



2013년 12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북한발 뉴스가 있습니다. 북한의 2인자라고 불렸던 장성택의 사망이 그것입니다. 장성택의 사망은 한국, 중국 등 동북아 국가는 물론 미국, 유럽 등 서방에도 큰 충격을 던져줬습니다. 장성택의 죽음을 두고 김정은 정권의 공고성 혹은 취약성을 진단하는 기사와 논설도 쏟아졌습니다. 김정은의 고모이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가 장성택 숙청을 기도했다는 이야기부터, 조선로동당 내 당-군 정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야기, 쿠데타를 기도하다 발각되었다는 이야기 등 수많은 루머가 떠돌았습니다.


몇 년 후, 전 외교관이자 대학 총장인 라종일 박사가 책 한 권을 출간했습니다. <장성택의 길: 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이 그것입니다. <장성택의 길>은 장성택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책은 독특하게도 학술논문도, 소설도, 수기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자가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혹은 확인해서는 안되는 이야기까지 책에 적을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진짜 이야기를 구분해낼 수는 없지만, 저자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라종일. <장성택의 길>. 알마. 2016.


장성택, 권력의 중심으로


장성택은 이른바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김씨 일가를 이르는 '백두혈통'도 아니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혁명세력도 아니며, 시골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장성택은 해방 직후인 1946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습니다. 장성택은 이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만남을 가집니다.


김일성종합대학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꿈도 꾸지 못한 또 다른 행운이었다. (...) 위대한 수령의 따님이 그에 대한 애정 공세를 퍼붓는 것을 넘어 결혼까지 고집하는 것이었다. -p.58


김일성의 딸, 김경희가 장성택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장성택은 대학 시절 학생위원장,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 위원장, 노동당 세포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맡고 있던 리더였으며, 뿐만 아니라 악기와 춤, 노래에도 능해 학우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합니다. 김경희는 이런 장성택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했습니다. 당시 북한 대학교의 분위기는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자유로워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60년대에는 남한의 대학이 더욱 억압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경희가 장성택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챈 김일성은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었던 황장엽에게 시켜 장성택과 김경희가 마주치지 않도록 수정했습니다. 저자는 장성택의 아버지가 김일성과 다른 노선의 항일투쟁가였다는 점이 작용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자 김경희는 오빠 김정일과 아버지 김일성에게 찾아가 왜 자신의 사생활에 끼어드냐고 따져물었습니다. 김일성이 장성택을 아예 원산으로 보내버리자, 김경희는 매주 주말마다 아버지의 자동차를 훔쳐 선물을 들고는 장성택에게 찾아갔다고 합니다. 김정일은 김경희와 장성택의 사랑을 용인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김일성은 이들을 허락합니다.



  부부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던 권력 김정일의 배려와 주선 덕분이었다. (...) 그러나 김정일에게 장성택은 누이가 사랑하는 남자라기보다 자신이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측근, 자기 권력의 일개 장치에 불과했다. -p.113


장성택은 김정일의 북한에서 승승장구합니다. 장성택은 무서울 정도의 업무 추진력때문에, 때로는 너무 지나치게 밀어붙였다는 질책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건설 사업의 자재나 재원, 혹은 김정일이 좋아하는 물품 등을 조달하기 위해 해외에 자주 다녔고, 이로 인해 '(해외에)나와 다니는 김정일'로 불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신(神)과 인간 사이의 2인자


북한에서 김정일 다음 가는 장성택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는 독재자 김정일이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북한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했으며, 돌발적인 김정일의 성격 때문에 국정 운영이 어긋나지 않도록 바로잡기도 했습니다. 김정일 또한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해, 장성택이 이따금씩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잘했다'며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문제점에 대한 장성택의 문제의식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아래 황장엽이 소개한 일화가 이를 드러냅니다.


  1980년대 중반 황장엽은 대학 시절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장성택에게 자신이 느끼는 위기감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경제가 파탄하지 않겠는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장성택은 태연히 대답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 우리 경제는 이미 파탄이 나 있는데 또 어떻게 파탄이 나겠습니까?" -p.28


장성택은 이후로도 북한 경제에 대해 안타까움을 터놓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국 등 외국에 나갔을 때는 "중국은 어떻게 저렇게 잘 하는가?",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는가?"하고 탄식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물론, 장성택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남한에 대해서도, 남한이 잘 한다고는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2002년 경제시찰을 위해 남한에 방문했을 때 술에 취해 "이젠 도저히 경쟁이라는 말을 할 수도 없겠구나"는 식의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장성택은 북한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2002년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지도하고, 숙청당하기 직전까지도 경제 특구를 획기적으로 추가하고, 외국인 투자보호법을 정비하고, 관광 산업 진흥을 위한 법안들을 마련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남한과의 관계가 순탄해야 함을 확실히 이해하여 개성공단을 유지하고자 노력했고, 중국과의 경제협력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2인자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김정일은 누군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습니다. 김정일의 통치 방식 중 하나는 '연회정치'였는데, 자신의 측근들을 위한 연회를 수시로 베풀어 선물을 주고, 공연을 하는 등 음주가무를 즐기며 측근들의 진짜 속내를 파악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장성택은 자신들의 측근들을 불러 이와 비슷한 파티를 벌인 적이 있는데, 김정일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장성택을 귀양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몇 번의 귀양과 혁명화(처벌) 과정을 받으면서도, 그는 김정일의 곁에서 2인자로 살아남았습니다.


 장성택은 김정일 사후에 어수선한 북한의 정계를 휘어잡고 김정은을 보좌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장성택은 북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쥘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승계되는 과정에 김정은과 장성택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예고됐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장성택으로서는 김정일의 와병과 김정은의 등극 사이 기간이 그의 생애를 통해 위상과 역할이 가장 돋보였던 시기였다. 이것은 그의 공식적인 지위, 즉 인민군 대장 칭호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같은 공식적인 지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한평생 김씨 정권의 어느 경계선상에서 살아왔다. (...)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의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 정권의 핵심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p.233


저자는 장성택이 김정은에게 숙청된 결정적인 이유가, 장성택이 김정은의 지시에도 자신의 업무를 접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연유사업소 건설 문제를 둘러싸고, 행정부 내부에서 김정은의 지시가 장성택의 지시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 도화선이었다고 합니다. 장성택은 조선로동당 내에서 공격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장성택은 시종일관 떳떳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간부들이 자신을 연이어 고발할 때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책상에 내리쳐 부러뜨릴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이 곳에서 보안요원들에게 끌려나간 장성택은 마침내 사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혁명은 자기 자식들을 집어삼킨다." -p.70



장성택은 유일영도체계 속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 혹은 반신의 영역까지 나아간 처음이자 마지막 인간이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북한 체제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며, 보다 변화된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2인자의 숙명은 그보다 더 강력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김일성 시절부터 내려오는 이른바 혁명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끝없이 처단하는 북한 체제를 바라보며, 장성택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통일을 준비하는데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