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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통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탈북청년모임 '위드유'(with-U)

  탈북청년모임 with-U(이하 위드유)’에서 주최하고 하나금융그룹이 후원한 광복 70주년 기념 통일세대를 위한 대한민국 현대사강좌’가 지난 718일 외환은행 본점 4층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행사는 지난 7월 11일에 이어 열린 두 번째 시간이었는데요. “보수와 진보 모두 배울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쪽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쉬운데 함께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지적한 위드유 지성림 대표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 통일세대인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이번 현대사강좌를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7월 18일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진행된 '광복70주년 기념 통일세대를 위한 대한민국 현대사 강좌'에서 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 지성림 대표가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지난 7월 18일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진행된 '광복70주년 기념 통일세대를 위한 대한민국 현대사 강좌'에서 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 지성림 대표가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탈북자 단체라고 하면 흔히 보수 성향의 단체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탈북청년 8명이 모여 결성한 위드유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의 균형된 시각을 지향하고 좌우의 통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어딘가 달라보였습니다. 또 이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작년 여름 가수 이승철씨가 탈북청년들과 함께 독도에서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었던 일, 기억하시나요? 이 역시 위드유에서 마련한 행사입니다. 위드유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 기사2부는 위드유의 박영철 사무국장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기로 했습니다.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지난 729, 서울 마포구의 우양재단 사무실에서 박 사무국장과 마주 앉았습니다.

 

△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의 박영철 사무국장이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의 박영철 사무국장이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 위드유는 어떻게 결성되었나요?

 학교 졸업 후 직장에 다니는 고향 친구들 8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이 있었어요. 딱히 할 것도 없이 얘기만 나누다가 탈북 후배들을 위해 우리가 뭔가 좀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출발한 것이 지금의 위드유입니다.

- 위드유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크게 두 가지에요. 저는 고생을 해서 탈북을 했고, 남한 사회에서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어요. 학교 적응도 어렵고 취업 준비도 힘들었죠. 이러한 어려움들을 탈북 후배들도 똑같이 겪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탈북 후배들을 응원하기 위한 활동을 해요. 두 번째로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한 활동이에요. “통일이 되면 경제가 나빠질 것”, “북한이탈주민은 말도 안 통해서 같이 못 살겠다등 부정적인 의견이 많아요. 우리는 이러한 의견들이 긍정적으로 바뀌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남한 사람들에게 우리 탈북청년들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출신은 북한이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자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우리도 여기 내려와서 열심히 사니까 밝은 이미지로 봐 달라는 의미에서 출발했어요.

- 위드유의 첫 활동은 무엇이었나요?

 2013년에 했던 마중물 음악회가 첫 활동이에요. 마중물 음악회는 위드유 결성 멤버 8명의 첫 열매입니다. 음악회를 통해서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라고 느꼈거든요. 후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하다가 음악회를 열어 티켓을 팔아 후배들을 위한 후원금을 마련키로 결정했죠. 음악회에서 홀로아리랑을 부르기로 하고 지휘자도 없이 무작정 연습부터 했어요. 사회자와 인디밴드 섭외도 재능기부식으로 도움을 받았어요. 음악회를 열었던 날짜인 111일도 나름의 의미가 있어요. ‘11.1’, 둘이 하나 되는 날이죠. (웃음) 정말 뿌듯했어요. 100명의 관람색이 찾아주셨고 후원금도 적지 않게 모였어요. 우리끼리는 스토리와 감동, 그리고 재미이 세 가지가 모두 있었던 음악회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와 탈북대학생, 가수 이승철 씨가 함께한 '독도음악회' 행사가 지난 2014년 8월 14일에 진행되었다.(사진=뉴시스)△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와 탈북대학생, 가수 이승철 씨가 함께한 '독도음악회' 행사가 지난 2014년 8월 14일에 진행되었다.(사진=뉴시스)

 

 이후 위드유는 또 다른 음악회를 계획합니다. 언론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독도음악회입니다. 작년 814, 광복절을 맞아 독도에서 열린 이 음악회는 가수 이승철 씨와 함께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위드유가 모집한 42명의 탈북청년들과 이승철 씨는 남과 북이 모두 사랑하는 우리 고유의 영토 독도에서 홀로아리랑과 함께 통일송 그날에를 합창했습니다. 위드유의 독도음악회는 지난 1‘KBS 특별기획 이승철과 탈북청년 42인의 하모니-그날에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 독도에서 음악회를 열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독도음악회는 마중물 음악회의 감동에 이어 바로 추진한 행사에요. 마중물 음악회에서 불렀던 홀로아리랑의 가사가 독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그 노래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탈북청년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의 정체성을 독도에서 알리자는 장황한 꿈을 갖고 준비했습니다. 함께 할 탈북 대학생들을 모집했고, 기획안을 들고 여러 단체를 찾아다녔어요. 선박업체 대아그룹과 경상북도에서 특히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래도 우리의 힘으로 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일부 비용은 직접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었어요. 홀로아리랑외에 남과 북의 주민들이 쉽게 부를 수 있고 정치색이 배제된 통일송을 마련하고 싶었는데, 마침 G&M글로벌문화재단 문애란 대표의 소개로 가수 이승철 씨와 인연이 닿아 그날에라는 노래가 탄생했어요. 이승철 씨는 독도행에 합류해 합창단의 지휘를 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독도에서 음악회를 할 때의 영상을 보면 홀로아리랑중간에 우리 중 누군가가 이야기(멘트)를 해요. 그 말이 우리 탈북청년들이 평소에 가장 전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우리 탈북청년들은 홀로 섬독도와 정체성이 똑 닮았습니다.
 독도가 지리적으로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동해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탈북자는 북한으로부터 배신자라 욕먹고, 남한에선 적응 못 한다고 손가락질 받습니다.
 하지만 독도는 남한 사람, 북한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우리의 땅입니다.
 독도와 마찬가지로 탈북청년들을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응원해준다면
 북한도 경험하고 남한도 경험한 우리 탈북청년들을 통일의 징검다리가 될 것입니다.

 

△지난 7월 18일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진행된 '광복70주년 기념 통일세대를 위한 대한민국 현대사 강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영철 사무국장.△지난 7월 18일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진행된 '광복70주년 기념 통일세대를 위한 대한민국 현대사 강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영철 사무국장.

 

- 위드유의 슬로건이 좌우, 남북 모두 함께에요. 우리사회의 통합과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탈북청년들의 모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걸 보면 유난히 좌우·사회의 통합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위드유의 기본 정신 중 하나가 정치, 종교를 다 배제하고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에요. 남북한 주민들이 한 마음이 되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내는데 중점적인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의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우리 위드유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해요. 대표적인 활동이 이번에 개최한 현대사 강좌에요. 좌우 이념의 차이를 넘어 한국의 현대사를 균형 있게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 통합과 통일에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근현대사에 대해 잘 모르는 청년들이 많은데, 통일세대들이 역대 대통령들을 바라볼 때 좌우 이념을 떠나 그들 모두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나라고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의 박영철 사무국장이 박지화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의 박영철 사무국장이 박지화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박 사무국장은 탈북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스런 기억들도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던 고난의 행군시기에 처음 두만강을 넘었다는 그는 처음에는 정말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탈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가 식량을 얻거나 돈을 벌기 위해 두만강을 오고 간 횟수는 약 3~40차례. 그 중 4번은 중국 공안에 의해 강제 북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는데요. 그가 온갖 역경을 감내하면서도 끝내 대한민국으로 오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북한을 완전히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선 때는 언제인가요?

 2000년이었어요. 중국에서 한 열흘 간 일을 하고 번 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와 동생이 먹을 게 없어서 그동안 계속 굶은 채로 누워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여기 있다가는 우리가족 다 굶어죽겠구나. 여기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중국으로 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위험하다며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동생만이라도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동생과 함께 탈북을 했어요.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따라 나서지 않으셨어요. 당시 저는 나중에 모든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 탈북 과정이 굉장히 험난했을 것 같은데.

 그 때가 7월이라 장마철이어서 두만강 물이 많이 불어 있었어요. 잘 먹지 못해 체격이 굉장히 왜소했던 동생을 업고 두만강을 죽기 살기로 건넜죠. 중국에서는 변방대(국경수비대)를 피해 산을 타며 이동했어요. 그러다가 한국에서 NGO활동을 하시는 분을 만나 한국행을 부탁했어요. 그 분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다가 태국으로 넘어왔어요. 중국 쿤밍에서 태국 치앙마이로 가는 길이 굉장히 험난해요. 그 때가 우기라 소나기가 쏟아지고 벌레도 많아 고생했어요. 작은 보트에 의지해 메콩강을 건널 때는 배가 갑자기 뒤집혀 죽다 살아나기도 했지요. 그 어린애들이 물속에서 살겠다고 뭐든 잡으려고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국에는 다들 무사히 태국에 도착해 약 2개월 간 대사관에서 머물렀어요. 나중에 한국에 왔는데 그날이 마침 크리스마스였어요. 그 뒤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나와 경기도 안산의 동산고등학교에 편입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 대한민국에 정착하는 과정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북한이탈주민으로써 겪은 사회적 편견이나 어려움은 없었나요?

 사실 특별하게 차별을 받았거나 한 적은 없어요. 딱 한 가지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취업할 때 북한이탈주민이라고 이력서에 한 줄 들어가거든요. 과거에 취업 준비를 할 때 여러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서류에서 많이 떨어졌어요. 그 때 북한 출신이어서 취업이 안 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직접적으로 차별을 받아 피해를 본 경험은 없습니다.

 

△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의 박영철 사무국장이 하준호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의 박영철 사무국장이 하준호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 위드유의 탈북청년들은 소위 장마당 세대잖아요. 일각에서는 북한의 장마당 세대가 북한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북한이 조만간 열릴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통행의 자유가 없어서 다른 지역의 일을 알 수 없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 모든 게 다 무너졌어요. 통행도 자유로워졌고 사람들은 장마당에서 정보를 공유했죠. 주체사상이 가지는 힘도 예전만 못해요. 옛날에는 남한 사람들이 다 못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딜 가도 남한이 잘 산다는 것을 알아요. 사람들의 의식이 깬 거죠. 하지만 정치범이라는 것이 굉장히 무서워요. 나 하나만 잘못해도 가족 모두가 처벌받는 연좌제니까. 사람들이 무서워서 일어나지를 못해요. 그래도 이제는 북한에 핸드폰도 많이 보급되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정보를 주고받게 될 거에요. 과거 중동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듯 북한도 그 시기가 올 거라 생각해요. 통일은 어떤 식으로든 될 거라고 믿습니다.

- 북한의 장마당 세대와 같은 또래인 남한의 2030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먼저 통일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요. 기성세대는 취업이 힘들지 않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아요. 시간이 갈수록 더 힘들어 질 겁니다. 돌파구는 통일이라고 생각해요. 한반도가 통일이 되어 왕래를 하면 자연스레 일자리가 많아질 거라고 장담합니다. 이런 점에서 통일은 젊은 세대들에게 굉장히 중요해요. 두 번째로 우리가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은 통일에 대한 간절함때문이기도 해요. 기성세대들은 부모님이나 친척 분들의 고향이 이북인 것도 보고, 그 분들이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통일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요. 북한이탈주민 같은 경우에도 통일이 정말 간절해요. 북한이 고향이고 가족과 친구들이 북한에 있기 때문이죠. 너무 그립지만 통일이 되어야만 내 고향에 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간절한데, 남한에서 나고 자란 젊은 세대들은 통일에 별다른 감정이 없잖아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에요. 하지만 앞으로는 남한의 젊은 세대들도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과 간절함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7월 18일의 '현대사 강좌' 행사에서 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의 현장 요원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다.△지난 7월 18일의 '현대사 강좌' 행사에서 탈북청년모임 with-U(위드유)의 현장 요원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다.

 

 탈북청년모임 위드유의 다음 활동은 아직 미정입니다. 박 사무국장을 포함한 8명의 핵심 멤버들은 연말 워크숍에서 다음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할 예정입니다. 박 사무국장은 우리는 어떤 얘기가 나왔을 때 좋구나!’하면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아마 내년 초 즈음에서 구체적인 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남한청년들과 탈북청년들이 만나 함께하는 통합 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박영철 사무국장은 이날 장시간의 인터뷰에도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통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위드유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에서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을 슬기롭게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진정으로 탈북 후배들을 걱정하고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엿보였습니다.

 어쩌면 기억하기조차 싫을 지도 모르는 탈북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박 사무국장은 웃음을 잃지 않았는데요. 힘들었던 기억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그를 보면서 분단된 한반도의 모습도 언젠가는 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하는 간절한바람이 생겼습니다.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좌우 이념적 논쟁을 떠나 남북의 주민들, 나아가 한반도의 진정한 통합을 위해 힘쓰는 탈북청년모임 위드유. 앞으로 그들의 활동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사진=하준호, 박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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