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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북중접경지역 탐방기 2, 2015 통일리더캠프(국외) (4,5,6 일차)

 

 안녕하세요! 양다혜기자입니다. 지난 5월 22,23일에 열렸던 국내 통일리더캠프에 참가한 뒤 국외 통일리더캠프게도 참가하게 되어, 지난 6월 30일~7월 5일, 5박 6일 동안 중국 대련~연길까지의 여정으로 '북중접경지대'를 탐방하고 왔습니다! 1, 2, 3일차의 여정을 담은 김도희기자의 북중접경지역 탐방기 1, 2015 통일리더캠프(국외) (1,2,3 일차) 사를 먼저 읽고 오시면 여러분께서도 이 가슴 벅찬 여정의 감동을 더 풍부하게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다 함께 여행을 떠나봅시다. ^_^

 출바알~!

 

   4일차   

4일차에는 그리고 그리던, 한반도에 가장 높은 '백두산' 에 다녀왔습니다!

<백두산 정상으로 향하는 1442개의 계단>

 

   백두산은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백색의 부석이 얹혀 있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 우리 땅에 속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이민족들이 살았고, 조선 초기 4군 6진이 개척되면서 다시 우리 민족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도 청나라의 시원지로 백두산을 정하여 이를 기념하는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후 1960년대 국경협약으로 인해 국경을 잇는 직선으로 백두산의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북한이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활화산으로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여러 시대의 지층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생대와 신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단열구조, 파열구조 단층이 발달하였습니다.

<계단 전까지 올라오는 버스의 정류장, 그리고 멋진 하늘>

  백두산의 기후는 찬 대륙성 기후로 연평균 강수량도 매우 높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수량이 많은 지역에 속하며 특히 여름 장마 기간에는 많은 비가 쏟아집니다. 눈이 내려 쌓이는 기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고 합니다. 하루의 날씨 변화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비가 내리고 개기를 반복하는 날이 많아서, 그만큼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것이 어렵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토록 보기 힘들다는 백두산 천지를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1442개의 계단을 오른 뒤 보게 된 백두산 천지의 광경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면서 무의식적으로 읊조렸던, 가장 높은 산이라고 말로만 들어왔던 바로 그 백두산의 천지를 직접 눈으로 본 순간의 그 벅차오르는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답니다. 그 눈부신 광경을 함께 감상해보시죠!

 

<활짝 열린 아름다운 백두산 천지>

<백두산 천지에서 홀로, 그리고 아끼는 B7 팀원들과 함께>

  백두산 정상에 있는 칼데라호인 '천지'는 '용왕담'이라고도 합니다. 천지 둘레에는 장군봉을 비롯한 화구벽 오봉이 병풍처럼 둘러서있습니다. 호수의 기온은 10˚C 내외이며 빈영양호이므로 식물성 부유생물, 작은 곤충류, 물속 이끼류가 살고 있으나 어류나 파충류는 서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멋진 백두산 천지를 보고 밀려오는 감동 뒤에는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있었습니다. 37호 경계비와 울타리는 백두산 천지의 2/5는 중국, 3/5는 북한이 관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약에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국경을 통하지 않고서 북한쪽으로 바로 버스를 타고 백두산에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백두산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지만, 이국땅을 거쳐 오랜 시간을 거쳐야만 밟아볼 수 있는 백두산의 거리는 분단의 아픔을 절실히 말해주었습니다. 장엄한 천지의 광경을 보며 팀원들과 함께 짧은 함성을 외쳐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슴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에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학생으로서 더욱 더 통일이라는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말입니다.

 

  5일차 

  5일차에는 '용정'에 방문하여 해란강을 비롯한 시내의 광경과 '일송정' 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대성중학교''윤동주시인의 생가'를 방문했습니다.


 용정은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로, 주도인 '연지'에서 남서쪽으로 200km 떨어져 있는 상공업도시입니다. 1913년에 '연변 현'이 설치되었다가 1983년에 '용정 현'으로 개칭하였고, 1988년 7월에 시로 승격하였습니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시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으며, 주변의 비옥한 농경지에는 쌀, 콩, 수수, 옥수수 등 농산물이 산출됩니다.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시의 풍경>

 용정시에서 서쪽으로 약 31km 떨어진 비암산에 '일송정'이 있습니다. 원래 산정상에 우뚝 선 한 그루 소나무로써 그 모양이 정자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용정 8경'의 하나로 꼽힙니다. 일송정 정자는 60여년 전 항일혁명근거지의 비밀회의 장소로 활용하는 등 많은 애국인사들과 애국청년들이 모여 활동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나무 한그루가 항일의 상징이 되자, 일본군은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을 사격장을 만들어 민간의 출입을 통제하고 일송정을 사격 과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1991년 용정시 정부가 한국 각계 인사들의 후원을 받아 옛 자리에 소나무를 심어 복원하고 정자를 신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일송정의 정자>

<일송정>

 항일운동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소나무 한 그루에도 탄압을 가했던 일제시대의 가혹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혹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의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며 지켜낸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다는 현실에 대한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통일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성중학교>

 대성중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무대인 용정에 있는 학교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 교육의 산실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입니다. 현재 학교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건물 2층에 있는 사적 전시관에는 1990년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용정과 주변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사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입구의 모습>

 

 

<윤동주시인 생가의 입구>

  윤동주 시인 생가는 1900년경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이 지은 남향의 기와집으로, 기와를 얹은 열 칸과 서쪽에 자리한 동향의 사랑채가 있는 전통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윤동주의 가족이 이사 간 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1981년 허물어졌으나 1994년 8월 연변대한 조선연구센터의 주선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윤동주가 유년기에 공부를 하고 방학 때 귀향하여 시를 쓰던 방이 당시 그대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김도희기자(왼쪽)와 함께>

 

<곳곳에 비석으로 세워진 윤동주의 시>

 

 윤동주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17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항일 운동의 혐의를 받고 1945년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주요작품으로는 <서시>, <별 헤는 밤> 등이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독립을 원했던 그의 마음이 담긴 <서시>를 함께 감상하면서 그 뜻깊은 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6일차   

  6일차에는 도문시에 가서 '두만강'을 보았습니다.

 현재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 최북단인 북한 남양시를 마주하고 있는 중국 국경도시가 바로 도문시입니다. 두만강에 놓은 약 100m의 다리마을 두고 북한과 중국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두문은 연변자치주 내에서도 작은 도시에 속하지만 최근 북중 경협으로 인해 접경지역의 북한 주민들도 통행증만 있으면 비교적 자유롭게 오가며 무관세로 교역을 할 수 있는 무역시장이 개장되었습니다. 또한 북한 지역을 가까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두만강은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어서 두만강 앞의 광장의 풍경을 담아왔습니다!

 

<두만강 광장에서 팀원들과 통일을 기원하며>

 

 

<광장에서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관광객을 위한 공연>

 

 우리의 한반도, 한 민족이 살고 있는 우리의 땅... 그곳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도문시. 바로 100m 앞에 북한을 두고도 갈 수 없고, 사진에 조차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러한 아픔을 직접 경험한 것을 계기로 통일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마지막 날, 연길공항 앞에서>

 

 마지막 날 연길공항에서 팀원들과 지난 5박 6일 동안의 소감과 통일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뜻깊은 두 친구의 소감을 여러분께도 전합니다!

 

 

윤상아, 22세

 5박6일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백두산 천지에요. 날씨가 안 좋은 날이 더 많다고 유명한 천지를 보러 1442개의 계단을 기대 반, 두려움 반을 가지고 올랐어요. 다행히도 날씨가 좋았고 정말 신비롭고 아름다운 천지를 볼 수 있어서, 바쁜 일정의 피로가 모두 날라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네 번째 날에 방문하였던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는 근현대사 독립투쟁 파트를 가장 좋아하는 저로서는 가장 흥미있는 곳이었어요. 실제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용정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뛰었고, 독립운동가분들의 기운과 힘을 느낄 수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그 날 연길의 큰 광장을 갔었는데 마침 조선족 축제가 열려 한국 노래, 무용 등이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었어요. 바로 옆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강 바로 맞은편에는 북한이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한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장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나라의 민요, 노래등은 남과 북에 대해, 통일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만들었어요!

안형건, 23세

 캠프 4일차 되던 날은 손에 꼽힐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린 날이었어요. 애국가나 책에서 듣던 백두산을 오른다는 것에 설렜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버스를 타고 40분을 이동해 내린 곳은 1442개의 계단의 시작점. 내리자마자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마주한 웅장한 경치에 감탄했습니다. 1400여개의 계단을 오르면서 고개를 뒤로 돌려가며 경치를 눈에 담다보니 어느덧 꼭대기. 꼭대기의 천지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른 물이 가득 차있었어요. 눈은 토끼눈이 되고 심장은 달아나고 입은 떡 벌어져 표정 관리가 안 되었습니다! 이 멋진 산을 중국을 통해 올라와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산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비가 왔다가 그쳤는데 커다란 두개의 무지개가 아주 선명히 보였어요. 통일리더들의 멋진활약을 기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였을까 생각해봅니다! 윤동주 생가는 일제시대의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저항시인 윤동주의 집으로 그가 쓴 시가 가득했고 그의 시는 절절하면서도 힘 있고 날카로웠어요.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대성중학교는 이들을 기리는 전시관을 마련해두어 저처럼 역사에 둔한 사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재중교포들에게 감사했습니다.
 북한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습니다. 중국인들이 압록강 하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을 보았는데 강 건너편에는 북한의 초소가 보였습니다. 두만강에서는 북한의 가옥들을 잘 볼 수 있었는데,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지만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고 있기에 안타까웠어요... 이번 캠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통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통일은 우리민족의 염원이자 꿈으로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통일캠프를 수료한 통일리더로서 통일에 앞장서 통일에 관한 올바른 가치관과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활발한 활동을 하겠습니다!

 

 

 이번 해외 통일리더캠프에 오기 전에 친구들에게 통일을 테마로 북중접경지대로 여행을 간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 지역과 백두산을 보러 간다고, 정말 기대가 된다고 말입니다. 이에 돌아오는 친구들의 반응은, "왜 힘들게 그런 곳을 가?", "바다가 있는 휴양지에서 편히 쉬다 오는 게 낫지 않겠어?" 등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말들에서 통일에 대한 젊은이들의 인식의 방향이 어디쯤인지 느껴졌습니다.

 물론 지난 5박 6일 동안 많이 힘들기도 했습니다. 넓은 중국 땅에서 하루 7시간이 넘는 이동시간은 기본이었고, 여러 유적지를 보기 위해 많이 걷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적과 북한 지역을 사진으로 조차 담을 수 없는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정에서 이러한 고생들을 뛰어넘는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늘 말로만 외치던 "통일의 필요성과 당위성"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수 많은 독립투사들이, 어렵게 찾아온 광복 후에 이처럼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를 보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요? 통일이 되어 북한에 있는 여러 역사적 유물과 유적지를 더욱 깊이 연구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한민국 헌법 제 3조를 알고 계시나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남한 반쪽이 아닌 한반도 '전체'입니다. 지난 5박 6일의 여정에서 제가 느꼈던 통일에 대한 절실한 바람을,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서도 함께 느껴주시기를 바랍니다! 

 

* 참고자료 : 2015통일리더캠프(국외) 책자, 통일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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