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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6·25 전쟁 그것이 알고싶다 1부 <6·25 남침의 진실>

  

6.25전쟁, 그리고 그 결과로 빚어진 남북분단과 정전. 이것은 여전히 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의 인식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전쟁을 겪지않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이 사건은 그저 역사 이야기로 여겨질 수도 있을것입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이 전쟁에 대한 그릇된 교육의 영향으로 인해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2013년 서울 신문이 진학사와 함께 '청소년 역사인식 조사'를 시행한 후 나온 통계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고등학생 10명중 7명은 6.25 전쟁이 남침이 아닌 '북침'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울신문이 입시전문업체인 진학사와 함께 최근 전국의 고등학생 5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0일 내놓은 ‘2013년 청소년 역사인식’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9%(349명)가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답했다.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6종 모두 한국전쟁의 발발 형태를 ‘남침’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학생들은 북침(北侵)과 남침(南侵)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헷갈리거나 전쟁의 발발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식민 지배를 찬양하는 등 그동안 사회적 합의를 통해 역사의 근간으로 여겨졌던 사실들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면서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를 외면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사의 근간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2013-06-11 서울신문

  

이런 실정을 개선하고, 다시 한 번 우리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2회에 걸쳐 '6·25 전쟁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알아가 보려 합니다. 1편에서는 '6·25 남침의 진실'이라는 것을 다양한 자료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위 서울 신문 기사의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1.용어의 혼동 2. 부족한 역사인식> 때문입니다. 이 이유의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부 고등학생은 왜 6·25전쟁을 북침으로 알고 있을까

1. 용어의 혼동

이 기사가 보도된 후, 동아닷컴에서 시행한 심층적인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은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용어를 헷갈려 '북침'과 '남침'을 혼동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응답자 전원이 ‘6·25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해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만 ‘남침이냐 북침이냐’고 물었을 때는 ‘북침’이라고 대답한 청소년이 3명 중 1명꼴로 나왔다. 그렇게 대답한 청소년에게 북침의 의미를 묻자 이들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으니 북침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했다.

2013-06-25 동아닷컴 


2. 부족한 역사인식

더불어, 6.25 전쟁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모르는데 영향을 미친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80년대 부르스 커밍스의 수정사관'을 꼽을 수 있습니다. 수정주의란 6·25전쟁의 기원에 관한 학설 중 '남한과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설로 '남침유도설'로도 불리우는데요. 대표적인 학자는 미국 브루스 커밍스 교수로, 1981년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했지만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에 의해 허위임이 드러났지요. 

개인적인 이유로든 사회적인 이유로든 고등학생들의 이러한 부족한 역사인식은 참 안타까운데요. 그러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진실'을 전하고자 노력들 덕분에 왜곡된 것들이 바로 잡히고, 올바른 역사로 이어지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6·25 남침의 진실' 심포지엄을 통해 역사를 바로잡다

지난 달 6월 24일, 프레스센터 18층에 위치한 외신기자클럽에서는 중국 사학자 선즈화 교수를 초빙해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중국의 조선 파병: 모택동의 결정과정 및 동기분석'이라는 주제로 중국 공산당의 공식입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즈화 교수는 중국의 문화혁명의 와중에서 자수성가한 후, 소련의 정부문서고를 뒤져 다수의 외교문서를 발굴하여 공개하였고, 학자적 양심과 용기를 가지고 이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심포지엄 환영사 中)


 이날 선 교수는 "지난해 중국이 6.25 전쟁을 '조선전쟁'이라고 일컬으며, 이는 중국의 참여를 부각하지 않으려 하는 의도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중국이 공식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중국 내부의 시각과 의식의 변화가 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서 시작된 선 교수의 주제발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이 참전하고 난 뒤 중국이 북조선에 어떻게 지원하게 되었는지는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모택동은 적극적으로 중국 출병을 주장하면서 직, 간접적으로 소련에게 이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회피적인 태도로 대응하였으며, 이로 인해 군사적으로 유리한 시기를 많이 놓쳐버리게 되었다. 결국 유엔군이 38선을 넘어가게 되고, 이 위기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김일성과 스탈린 모두가 중국의 출병원조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는 중, 모택동은 많은 중국지도자들에게 북조선에 대한 출병원조 주장을 했지만 그들의 보수적인 태도로 인해 원만하게 합의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모택동의 출병에 대한 태도는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한편, 중국 출병의 원인과 동기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이 주장되고 있다. 하나는 '안보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혁명설'이다. '안보설'이란,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갔기 때문에 중국의 국가안보에 대해 위협감이 들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중국은 반드시 참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설'이란, 미국의 북조선에 대한 점령은 중국의 혁명의 승리 성과(;대만 문제)에 위협이 되었고, 아시아 혁명의 성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중국의 전쟁 개입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모택동의 혁명학설과 혁명정신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러한 과정을 정리하여 중국의 출병 과정을 6단계로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1950년 5월14일 : 모택동이 김일성에게 도움의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거절당함.

2. 1950년 6월25일 : 전쟁발발, 중국은 적이 후방에서 공격할 것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북조선에 도움을 주려 하였지만 스탈린이 반대함. 가장 좋은 시기를 놓침.

3. 1950년 9월15일 :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중국은 소련과 북조선에게 동시에 출병의 요구를 청하였지만, 스탈린이 동의하지않음.

4. 1950년 10월1일 : 북조선 인민 주력군대 패전, 유엔군38선 넘어 북쪽으로 전진, 스탈린과 김일성이 중국에게 출병 요구하였지만 중국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부정적인 태도. 모택동의 설득으로 결국 승낙.

5. 1950년 10월11일 : 미군이 소련 국경선 지역의 공군기지를 공중폭격함. 중소 양측은 협상을 통해 북조선을 포기하고 김일성이 중국 동북 지역에 망명정부 세우도록 하기로 함. 그러나 모택동은 동의 하지 않고 19일에 중국지원군이 선행 출동할 것이라고 결정.

6. 1950년 10월18일 : 미국 군함이 함흥지역의 해상에서 나타남. 소련 공군이 지원군과 함께 출병하지 못하였고 다만 중국의 영토만 보호할 수 있다고 결정. 모택동이 팽덕호와 상의 후 모든 지원군이 19일에 강을 건너갈 것으로 결정.


이렇게 전개되는 상황속에서 모택동은 많은 고민과 생각에 쉽지않은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써의 중국의 책임과 의무, 미국에 대한 저항의 혁명 정신, 국가안보 및 주권에 대한 위협 우려, 중소 동맹의 관계 강화를 통해 중국 공산당 정권의 공고화'라는 네 가지 이유 때문에 결국 참전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제에 관한 발표를 마치고, 이어진 이야기들 속에선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용기와 더불어 신중함이 보였습니다.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중국이 남침설을 인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곧 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확신있는 기대감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육군군사연구소'에서 발간한 '6.25전쟁은 북한이 대한민국을 기습남침한 전쟁이다'라는 책자에서 소개하는 '북한이 대한민국을 기습남침한 명백한 증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공개된 구소련 비밀문서 기록 : 스탈린 남침 승인 (1950.3.30)

- 소련의 북한 군사고문단장(바실리에프)이 작성

- 스탈린 승인 후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이 번역

2. 북한주재 소련대사가 1950년 6월15일에 본국에 보고한 문서

- "6월25일 새벽에 진격한다" (공격개시일 기록)

3. 북한군 정찰명령 제1호 (1950.6.18), 전투명령 제1호 (1950.6.24)

- "공격준비를 6.22, 24:00까지 완료할 것"과 공격개시 이후의 임무 명시

4. 북한군 제2사단참모부 지령 (준비명령)

- "병사들은 6.24, 19:00까지 식사종료 후 준비할 것"

- "23:00에 공격선 도착 및 공격준비할 것"

5. 주요 증언/ 기타

- "김일성이 전쟁을 발의하고 스탈린이 승인" (소련수상 후르시초프 회고록)

- "내가 남침 선제타격계획 작성"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1992년 이후 러시아 교과서에 '북한의 남침'이라고 명시


이와 같이 6.25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여 시작된 남침'입니다. 이 진실은 그저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닌 누군가의 헌신과 의지로 인해 이루어진 귀중한 것입니다. 이 값진 진실을 중요하게 여기며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세라 생각합니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역사 뿐이다"라는 연산군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는 결국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면, 이 진실들을 대하는 자세이며 다음 세대에 이 진실들을 더욱 밝히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역사교육은 기억에 대한 훈련과 영혼에 대한 세례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인생으로 하여금 강력한 신념과 행위를 갖도록 한다.  한 민족이 만약 역사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없다면 영원히 생명력을 잃게 된다."

여순 감옥의 항일 기념관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이 글귀를 우리 모두는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넘어가고 어느정도 짐작하는 것에 그치는 역사가 아닌, 그 무엇보다도 귀히 여기며 밝히 알아야 할 우리 역사. 이 역사에 대한 빛이 더욱 비추어 이 나라를 밝힐 때, 생명력 있는 나라, 생명력 있는 통일을 이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통일을 향한 한걸음, 함께 더욱 마음을 다하여 내딛길 소망하며 '그 날'을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