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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남북경제협력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과정

 남북 경제협력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7기 백승국 입니다. 통일을 만들어가는 큰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남북경제협력과 민간의 접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기사에서는 남북경제협력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남북협력의 첫 걸음,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남북단독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휴전협정을 겪은 후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지역을 한반도 미수복 지역이라 규정하여 무력통일론을 주장하였습니다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합법적인 정부라고 인정하지 않아 어떠한 교류와 협력도 정부방침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72년 미국과 소련의 갑작스러운 화해 분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이 북한을 방문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합의하고 돌아온 후 발표하여 남북화해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이후 남북적십자회담수재물자제공이산가족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등 제한적인 교류협력이 이뤄졌습니다.

                            

이후락과 김일성

▲ 악수하고 있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일성 주석

 

남북기본합의서

▲ 남북기본합의서를 채결한 직후의 양측 대표

 

  남북경제협력의 실천방안 추진, 1988년 7·7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0년대 후반 냉전이 와해되어 가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1988.7.7.)’을 계기로 공식적인 남북경제협력의 실천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내용은 남북한 간 교역 및 문호개방,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및 비군사적 물자에 대한 우방국과 북한 간 교역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발표를 하던 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남과 북은 분단의 벽을 헐고 모든 부문에 걸쳐 교류를 실현할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이어 그 해 10월에 남북경제개방조치를 발표하고, 북한과의 교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198811()대우 기업이 처음으로 북한 물품(도자기 519, 104천 달러)의 반입 승인을 획득하고 이 해 12월 말까지 4건의 반입 승인이 이루어지는 남북한 공식교역이 40년 만에 재개되었습니다


  남북경제협력의 실질적 기반 마련, 1991년 12·13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정부는 1990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남북협력기금법’을 제정함으로써 남북경제 교류 및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실질적인 기반을 갖추었으며, 이후 19911213일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내용 중 제3장 제15(남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전체의 복리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원의 공동개발, 민족 내부 교류로서의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에 따라 지속적인 남북경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북교역

▲남북교역 추이

   

  개성공업지구 사업의 기틀을 마련한 1998년

 1992년부터는 위탁가공교역이라는 새로운 경제협력 형태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는 원부자재를 북한에 보내어 북한 내에서 가공(임가공)한 뒤 완성품을 국내에 들여오거나 해외에 수출하는 방식의 교역입니다. 이 형태의 교역은 19929월 코오롱상사가 최초로 위탁가공교육 물품인 셔츠(6216, 38천 달러)의 반입을 성사시켰습니다. 1966년부터는 남한기업의 대북 투자협력이 개시되어, ()대우 기업이 남포공단에 북한의 삼천리 총회사와 합영회사를 설립키로 합의하였습니다. 이어 1998년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하면서 개성공업지구 사업에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활성화되는 분위기와 남북경협이 통일을 이끈다는 분위기 속에서 개성공업지구 사업에 물꼬를 튼 것은 현대그룹이었습니다. 현대그룹과 북한은 199910월 서해안 건설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서 공단 후보지로 해주, 신의주, 개성 등을 검토한 끝에 2000822일 서울에서 약 1시간을 육로로 이용하여 왕래가 가능한 개성에 공단을 건설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개성공업지구의 태동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

개성공업지구의 태동에는 현대그룹의 역할뿐만 아니라 20006.15 남북공동성명 이후의 남북화해와 교류의 증진도 배경으로 작용하였습니다. 20008월에는 현대그룹과 북한 당국 간 체결된 개성공업지구 건설에 관한 합의서에는 개성 지역에 2,000만평(66km²) 규모로 공업지구 및 문화, 관광, 상업 지구를 건설하기로 명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선 공장구역 중 1단계로 100만평(3.3km²)을 개발하기로 하여 2003630일에 역사적인 개성공단 1단계 착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200412월에는 개성공단 입주업체 중 최초로 '소노쿠진웨어'가 공장을 준공하고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개성공단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사업

▲ 개성공단 사업 현황                       

 개성공단이 우리에게 주는 통일비전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남북경협을 통한 남북경제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개성공단은 현재 유일하게 남북 민간이 만나는 접촉지대입니다. 그래서 단일경제체제를 구축해가는 과정을 통해 남북경제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금강산, 평양 관광 등 여러 남북교류사업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남북한의 '윈-윈'(상호이익)이 실현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해 더욱 더 발전하는 개성공단이 남북연합의 단계로 가는 큰 역할을 할 때 까지 통일부와 통일부 대학생기자단이 함께 하겠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7기 백승국 입니다.


[자료출저]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북한연구시리즈, 개성공업지구 법제의 진화와 미래

2014학년도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학기 국제관계론 수업, 양문수(북한대학원)교수 특강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