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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통일과 통합 사이 (1) 예멘의 통일과 통합

통일? 통합?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통일’은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핵심 키워드이다. 하지만 통일에 대한 담론을 세분화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통합의 문제 또한 제기된다. 통일과 통합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무엇이 다른가?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통일은 ‘나누어진 것들을 합쳐 하나의 조직·체계 아래로 모이게 함’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한편 통합은 ‘둘 이상의 조직이나 기구 따위를 하나로 합침’이라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만 가지고는 둘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분단국가의 통일과 통합으로까지 논의를 넓히면 통일과 통합의 경계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중국과 대만, 중국과 홍콩의 통일·통합은 현재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http://www.ahaeconomy.com/index.html?page=news/flypage&nid=1815&cid=16, http://duduchina.co.kr/?p=41105)


  사실 통일과 통합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에서는 통일과 통합을 동시에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두 개념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우리는 통일과 통합에 더욱 심층적이며 다각도로 접근해야 한다. 외국의 통일과 통합 사례로는 독일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독일은 탈냉전과 함께 국가적 통일을 이뤘을 뿐 아니라 이후 꾸준한 통합 노력으로 현재는 유럽의 중심국가가 되었다. 또한 최근 들어 중국의 사례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수많은 소수민족들과의 통합에 힘써왔을 뿐 아니라, 홍콩반환과 양안문제에 관해서도 현재진행 중에 있다. 반면 예멘과 베트남의 통일·통합 사례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주제이다. 무엇보다 한반도에서도 통일 이후의 통합 노력이 큰 관심사로 떠오른 만큼 예멘과 베트남의 통합 노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멘의 통일 과정

  예멘은 1873년 오스만 제국과 대영 제국의 협정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그러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 패망하면서 1918년 북예멘이 먼저 독립했다. 독립 직후의 북예멘은 왕조였지만, 1962년에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독재체제가 지속되었다. 한편 남예멘은 계속해서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7년이 되어서야 독립했다. 이후 1969년에 사회주의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공산주의국가가 되었다. 


(왼쪽)예멘의 지도와 (오른쪽)예멘 수도 사나의 전경
(출처 : http://ttalgi21.tistory.com/3130)

  예멘의 분단은 다른 분단국가들과는 달리 냉전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었다. 분단 시기 또한 남북이 순차적으로 독립하면서 분단되었기 때문에 양국 간의 민족적 이질감도 적었다. 오히려 민족감정이 뿌리 깊게 박혀있었기 때문에 통일은 독립 이래 줄곧 양국 공동의 목표였다. 물론 1970년대부터 시작된 남북예멘의 합의 과정에서 많은 분쟁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랍연맹의 중재로 인해 평화적 타협을 반복하면서 1990년에 협상을 통한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다. 


예멘의 통합 방식

  예멘 통일의 가장 큰 특징은 두 정부 간 합의를 통해 통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의 성격은 통합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자본주의 체제였던 북예멘은 공산주의 체제였던 남예멘보다 인구와 소득에 있어서 더 우위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멘 통일정부의 권력지분은 남북 비례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되었다. 통일 정부의 대통령은 북예멘 대통령이었던 살레(Ali Abduilah Saleh)가 되었고, 수상은 남예멘 대통령인 아타스(Haider Abu Bakr Attas)가, 부통령은 남예멘 사회당서기장 알 비드(Ali Salim al-Bid)가 맡았다. 또한 통일의회는 총 301명 중 북예멘 159명, 남예멘 110명, 비당파 인사 31명으로 구성되었다. 각료 역시 북예멘 출신 19명, 남예멘 출신 15명으로 배정되는 등 남북 예멘의 전반적인 국력에 비례해서 배분되었다. 


장기집권하고 있는 살레 대통령 (출처 : http://ttalgi21.tistory.com/3130)


  통일 직후 예멘은 엄청난 외채를 안고 있었지만 통일로 인해 경제가 크게 부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걸프전 당시 예멘이 친이라크를 표방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했고, 이로 인해 예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훨씬 개방적이었던 남예멘인들은 엄격한 이슬람문화를 가지고 있는 북예멘에 대한 불만으로 반정부시위를 지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통일정부는 이 같은 경제위기와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통일이 권력배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부조직은 물론이고 엘리트마저도 남북으로 이분화 되어 예멘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예멘의 반정부 시위는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출처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6/02/0200000000AKR20110602218100070.HTML)


  결국 1994년 4월 27일부터 예멘의 내전이 시작되었고, 북예멘이 남예멘의 수도 아덴을 점령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당초 북예멘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있었다면 내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남북의 격차는 정확히 산출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였다. 때문에 내전이 발생했으며 결과적으로 더 힘의 우위에 있었던 북예멘이 승리한 것이다. 이러한 애매한 힘의 격차로 인해 예멘은 합의와 권력 배분을 통한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지만, 반대로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내전을 일으킨 원인으로 돌아왔다. 약 2000명의 사망자를 낸 예멘의 내전은 통합을 배제한 상태에서의 단순한 국가결합은 통일 후에도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교훈을 한반도에 가르쳐주었다.


구희상

mejunate@nate.com


[참고자료]

임채완, 『분단과 통합』, (서울: 한울아카데미, 2006)

http://ko.wikipedia.org/wiki/%EC%98%88%EB%A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