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는 우리의 역사인 고구려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도 고구려의 후기 수도였던 평양과 인근 남포지역에 유적이 집중되어 있고, 그 외 몇 몇 고분들이 황해도 지역에 있으며, 나머지 산성들은 국방상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평양에 분포되어있는 고구려 유적을 찾아 떠나볼까요?
첫번째로 만나볼 곳은 안학궁 입니다.
안학궁은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장수왕 15년)에 건립된 궁성으로서 평상시 왕이 거처하여 정사를 펴던 곳입니다. 안학궁 뒤에는 대성산성을 축조하여 전쟁 때는 이곳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567년(평원왕 9년) 오늘날의 평양 중심부에 건립된 장안성(長安城)으로 다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수도였으나 지금은 평양시 대성산(大城山) 남쪽 기슭에 그 궁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는 것은 고구려 도성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평면도를 잠깐 설명해 드리자면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이 7~8m 높이의 둑덕에 위치해 지어졌는데, 남궁 중궁, 북궁의 세 켜로 배치되어 있으며, 동궁과는 수로가 격리시켜서 궁전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해자가 무엇일까? 수구문이 무엇일까? 궁금하실 것 같은데요. 해자란! 성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물을 흐르게 하여 방어하는 시설이고, 수구문이란 물길이 흘러가고 오물이 빠져가나는 문 입니다. 옛 유적을 보고 있으면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묻어나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만나볼 곳은 대성산성 입니다.
대성산성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8호로, 4세기 말, 5세기 초에 평양지역을 방위할 목적으로 지은 성입니다. 평양에서 가장 높은 산인 대성산에 있습니다.
427년(장수왕 15) 고구려가 수도를 중국 지안[輯安]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이후부터 왕궁인 안학궁을 지켰습니다. 안학궁과 약 750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일단 유사시에는 왕이 산성으로 피란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배치도를 보고 설명을 해 드리면, 길이가 7,076m나 되는 길이에 20개의 성문과 65개의 치성을 볼 수 있습니다. 성안에는 178개의 못자리와 함께 행궁터, 병영터, 창고터 등 30여 개의 집자리가 발견 되었구요.
남쪽장대인 소문봉에서 안학궁 터 전경이 보이는데, 이 주변 지역에서 고구려 때의 절터, 우물 터, 대동강 나무다리 터와 많은 무덤들이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볼 때에 전기 평양시대 고구려의 도성 중심지가 이 일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쪽장대인 소문봉에서 안학궁 터 전경이 보이는데, 이 주변 지역에서 고구려 때의 절터, 우물 터, 대동강 나무다리 터와 많은 무덤들이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볼 때에 전기 평양시대 고구려의 도성 중심지가 이 일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만나볼 곳은 평양성 입니다.
평양성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호입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때는 427년(장수왕 15)인데, 이 당시의 왕궁은 위에서 보여드린 평양시 대성산 기슭의 안학궁이었습니다. 전쟁때엔 안학궁 뒤편에 대성산성을 축조해 옮겨갔구요.(기억하시죠?)
이러한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는 것은 고구려 도성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산성으로 피란하면 평지성은 불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586년(평원왕 28)에 수도를 장안성(長安成)으로 옮기는데, 이곳이 현재 평양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입니다.
따라서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전기 평양성, 장안성을 후기 평양성이라고도 합니다.
배치도를 보고 설명을 해 드리자면, 평양성은 앞서 말씀 드렸듯이 평지성의 장점과 산성의 장점을 종합해 축성하였습니다. 내성 외성 북성 중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벽의 길이는 약 23km 입니다. 이중 평지성인 외성 부분은 일반 서민들이 사는 곳으로, 성벽은 돌로 쌓거나 돌과 흙을 섞어 쌓기도 했는데, 능선에는 외면 축조방법을 평지에는 양면 축조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성문은 내성과 중성 및 외성에 각 4개의 문을 냈으며, 북성에는 남문과 북문만 냈고, 외부와 통하는 중요한 성문에는 옹성을 쌓았습니다. 평양성은 왕궁, 산성, 서민들이 사는 곳이 모두 성안에 있는 최초의 성이었고, 이러한 도성의 모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네번째로 만나볼 곳은 동명왕릉 입니다.
동명왕릉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6호입니다.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왔다고 전해지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평양의 동남쪽 22㎞ 지점의 제령산 서쪽 끝, 구릉 위에 있으며, 중화진파리 십호분에 해당합니다. 분구(墳丘)에 2단 이상의 돌기단이 둘러 있고 묘역 시설도 갖추어져 있으며, 고구려 무덤 중 가장 큰 규모(둘레는 34x34m, 높이는 11m)입니다.
다섯번째로 만나볼 곳은 정릉사 입니다.
정릉사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7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절로, 동명왕릉 앞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폐사되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 복원하였습니다. 발굴 당시 '고구려', '정릉', '능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릇조각들이 발견되어, 이 절이 고구려의 동명왕릉을 위한 절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위의 배치도는 정릉사의 배치도 입니다. 정릉사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의 최대사찰로 고구려 사찰 가운데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짜임새 또한 고구려를 닮아 웅장합니다. 배치도를 보면 잘 느껴지지 않지만, 알려진 전체 규모가 3만 평방미터에 이를만큼 거대합니다.
여섯번째로 만나 볼 곳은 장수산성입니다.
장수산성은 황해의 금강이라 불리우는 장수산의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쪽은 하니봉 (710m)을, 동쪽은 동장대를 양쪽 끝으로 하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연결하여 쌓은 둘레 10여 km나 되는 큰 산성입니다.
장수산성도 평양성 처럼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성은 서쪽의 작은 골 안을, 외성은 동쪽의 큰 골 안을 둘러 막아 쌓았습다. 성벽은 대부분 자연절벽을 이용하면서 양면축조방법과 외면축조방법을 배합하여 쌓았습니다.
장수산성은 고구려시기부터 19세기 말까지 계속 쓰인 성으로, 성은 험준한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자연요새적 지형을 능숙하게 활용한 고구려 사람들의 슬기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장수산성은 곡창지대인 재령벌과 신원벌을 끼고 있으며, 그 규모가 큰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시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성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국 건축사를 배우며, 평양 부근의 고구려 유적 분포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아직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우리가 고구려 역사에 대해 더욱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방법은 통일이 되는 일이라 생각 합니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보존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물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문헌
리화선, 『조선건축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안병찬·최승택, 「새로 발굴된 평양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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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대한민국과 세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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